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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뷰 Jan 15. 2024

녹색의 찰나를 위한, 파랗고 붉은 방황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녹색 광선》리뷰

영화 속 '델핀느(마리 리비에르)'는 나부끼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이리저리 흩날린다. 7월의 화창한 여름, 모두가 행복한 여름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떠나는데 그녀는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도 못하고 파리를 떠났다 돌아왔다만 반복한다. 이곳저곳에 섞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자꾸 튕겨나와 혼자가 나온다. 대화는 불편해지고, 모두가 나를 일부러 괴롭히는 것만 같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괴로울 바엔 혼자 산책이나 하는 게 나은데, 막상 혼자 이 황금같은 여름 바캉스를 보내자니 너무나 외롭고 심심하다. 한편으론, 마치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먼저 맞는다고 내가 유별나서 유독 나에게만 이런 이상한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왜 세상은 나에게만 이렇게 어려운걸까? 그러는 와중에 반복하여 마주치는 것이 있다. 마치 운명처럼, 길에서 의미심장한 타로카드를 줍거나 녹색의 물건들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이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언제나 이 만남은 극적이다. 노을이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사라지기 바로 직전에, 그것도 운이 좋아야만 관측할 수 있는 녹색 광선을 보면 마침내 나의 감정과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외롭고 슬픈 감정과 상황이 이 신비로운 현상과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내 인생에 곧 행복한 날들이 찾아온다는 암시일까,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우연의 반복일까. 붉은 노을 속 잠깐 보이는 찰나의 녹색빛은 델핀느에게, 혹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걸까?




인간은 언제나 의미를 찾는다
: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 찾기의 여정


갓 직장인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성인들이 점을 보는 것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한 점집을 찾으러 기꺼이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점괘 결과를 적극 참고한다. 처음에는 신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공통의 대화 주제를 찾기 어려울 때 쓰는 비장의 카드 정도로 생각했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가를 떠나서, 솔직히 언제 어디서 꺼내도 흥미로운 대화 주제이지 않는가. 직장운, 성공운, 금전운, 연애운, 가족운 등 여러 카테고리의 사건들에서 고(go)와 스탑(stop)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의 구체적인 예언과 해답도 들을 수 있다. 해석할 수 없는 것을 해석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해준다는 것. 그것이 점의 매력인듯하다. 사실 인간의 일생에서 구체적인 해답을 낼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점을 보면서 원인을 찾고 해답에 가까워지고자 한다.


그러니까, 해답이 없는 일에도 답을 찾아야 하며 무슨 일이라도 해야하는 게 인간이다. 가끔 인간의 뇌는 사소한 자연현상에도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듯 보인다. 벌어진 일에 계속해서 의미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언제나 세상과 연결되길 원한다. 녹색광선이 델핀느를 세상으로 끌어들였다기보단, 델핀느가 세상으로부터 느끼는 소외가 녹색광선을 끌어들였다. 영화의 제목인 “녹색 광선”은 빛의 굴절에 의한 자연 현상이자, 쥘 베른 소설의 제목이다. 영화는 배경인물을 통해 대놓고 녹색광선을 관객에게 친절히 설명해주고, 심지어 마지막엔 뻔뻔스럽게 단어가 간판 위에 대놓고 등장한다. 그러면 그녀가 녹색광선이 이끈대로 따라왔기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였는가? 이 또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영화는 관객의 질문에 끝까지 모호하게 대답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에 이전처럼 슬픔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녀의 짧은 탄성 “ui!” 가 이를 증명한다.


중간에 친구들과 모여 주간지의 운세풀이나 점성술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붉은 상의를 입은 친구 '베아트리스'가 델핀느를 압박한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연애를 할 수 없다고, 그녀가 자극을 받고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게 그녀를 몰아세운다. 하지만 델핀느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기만 하다. 나도 노력을 하긴 한다고 반격한다. 검은 고양이를 껴안은 검은 옷의 '마누엘라'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연애운을 점쳐보라고 제안하며 잡지의 운세를 읽어준다. 통통 튀는 초록 옷을 입은 '프랑소와즈'는 베실베실 웃으며 이들의 설전을 구경한다.


이 장면에서 각 인물이 입은 옷 색깔에 성격에 대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면 어떨까. 놀랍게도 대충은 들어맞을 듯 하다. 검은 옷의 마누엘라는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고, 붉은 옷의 친구는 열정과 열의가 넘치며,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우리의 델핀느는 섬세하고 여린 성격, 그리고 연두에 가까운 초록 옷을 입은 프랑소와즈은 속을 알 수 없지만 델핀느의 여름 바캉스가 특별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홀로 울고 있는 델핀느를 위로하며 자신과 같이 가족 별장이 있는 '셰르부르'로 여름휴가를 가자고 제안한다. 불길함과 운명을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가 그들 곁을 어슬렁거린다. (물론 불행을 암시했다고 보기엔 너무 귀엽다) 결과만 말하자면, 프랑소와즈를 따라 떠난 여행에서도 새로운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아이들만 돌보다가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절대 “그냥” 벌어지는 일은 없다. “그냥” 찍은 장면이 없듯이, 어떤 의도와 메시지, 의미가 담겨있다. 한 장면에 깊게 몰입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느낀다. 역시 인간은 의미를 찾고 해석하기 위해 태어났다.



방황은 모험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
: 한평생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다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영화 속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고, 다른 사람들이 연애나 인생에서 수싸움을 할 때 쓸법한 패가 없다고 한다. 그녀의 친구들처럼 솔직하고 대담한 여성이 되기엔 용기가 부족하고, 고고하게 살기엔 소외감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여행에 가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이성을 만나기보단 아이들을 돌본다. 하고 싶어서 한다기 보단 하기 싫은 것들을 피하다 우연히 닿게 된 곳에 하는 수 없이 머무른다. 그리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며 외롭고 서글픈 눈물을 떨구고, 파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파리도 편한 공간인가?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방황한다. 특히 사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나도 델핀느처럼 내가 있어야 할 곳을 계속해서 찾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특히 대학생 때는 학과 단체활동에 어울리지 못했다. 참 이상한데, 나와 가장 비슷해야할 사람들인데도 너무나 다른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디자인과 동기들보다는 영화애니메이션학과 친구들로부터 더 동기애를 느꼈다.) 결국 이 하나뿐인 올해의 여름 휴가 기간을, 지금의 인생을 어떻게든 재미있고 알차게 보내는 게 목표이긴 한데, 빗맞는 화살처럼 자꾸만 주변에만 맴돌게 된다.


사람들 안에 있기엔 자꾸 상처만 받게 되고, 홀로 있기엔 너무 외롭고 심심하다. 인생의 딜레마다. 해답은 단순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단 한 명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야 온전히 내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런 사람을 찾아나선다고 구해지는가. 물론 소극적으로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벌리는 편이 나은 건 안다. 그런데 그런 용기는 나에겐 없다. 결국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과감해져보고(물론 남들 눈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느나 나에겐 이게 최선인걸 어찌하리오) 도저히 못 버티겠으면 울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라도 해야지. 운명의 상대는 커녕 나 자신이 원하는 걸 찾기도 어렵다. 사실 그게 더 문제다. 당최 나를 못 버티겠다.


우리가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고, 신점이나 우연의 계시를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고통이다. 마치 시지프의 신화처럼 드디어 나 자신이라는 퍼즐을 다 풀었다고 기뻐할 찰나에, 또 다른 내 모습이 등장하여 다 맞춰놓은 퍼즐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러면 잠깐 슬퍼했다가 다시 퍼즐을 맞추는 수 밖에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100% 확신을 갖고, 이를 단번에 획득해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지만, 정작 좋아하는 것에는 두루뭉술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게 좋은 선택일지 알고 결정내리는 게 아니라, 우선 한번 해보는 것 정도는 문제 없을테니 해 본 뒤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좋았다고 결론 내릴 뿐이다. “우와, 정말 갖고 싶어!” 라고 기대했던 것이 막상 손에 들어오니 별 거 아닐 때도 있고, “나랑 안 맞는 성향인 것 같아”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몇 번 만나보니 진국인 경우도 있다. 심지어 내가 무얼 원하는지를 찾기 위해 온 삶을 다 바치는 경우도 있을테다. 잊혀지지 않는 학창시절 기억이 하나 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수업시간에 모두가 자습을 하거나 쉬던 때였다. 중년의 사회탐구 선생님이 자습을 감독하였고, 맨 앞자리에 모여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선생님에게 진로 및 진학 고민에 대해 묻다가 말했다. “선생님은 원래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렇지는 않아. 사실 나는 아직 꿈이 없어” 고 말했다. 나에게 그녀의 대답은 깊게 각인되었다.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중년의 나이가 되어 바라던 꿈에 얼추 가까워졌을 법한 나이에 ‘“아직” 꿈이 없다’는 그녀의 고백은 충격이었다. 물론 중년의 나이에 꿀 법한, 이상적인 제2의 인생을 아직 찾는 중이다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으나, 철없는 고3이었던 나에게는 ‘그만큼 인생에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묵직한 충고로 와닿았다. 인생의 목표라는 게 나이가 들면서 자동으로 생기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재고해야 되는 것이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보다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라고, 그러므로 원하는대로 살기 위해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는 계기였다.


델핀느도 자신이 무엇이 잘못된 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이고, 바캉스는 하나도 즐겁지 않고, 운명의 남자는 커녕 함께 있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기 힘드니 자꾸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남녀 관계에는 밀고 당기는, 즉 패를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거나 하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한다고들 하지만 델핀느는 ”자신은 보여줄 패가 없다“고 한다.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면, 너무 신중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그런 신중한 모습, 조심스럽고 어색하지만 모험을 해보고자 하는 모습에 끌림을 느낀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가 운명의 상대일까? 알 수 없다. 그녀는 이를 알아보고자 한다. 바로 녹색광선으로.


녹색광선에 담긴 신비로운 이야기, 그리고 우연히 계속 마주치게 되는 타로카드들과 녹색의 신비로운 계시들. 자연현상일 뿐인 녹색광선이 이토록 경이로운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아무리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매일도 아니고 날씨가 좋은 날에, 그것도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붉은 노을이 지는 것을 다 기다리고 난 뒤, 찰나의 순간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초록 신비. 심지어 행운을 가져다주거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의 마음과 운명의 상대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무엇을 깨닫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결론

제목에도 버젓히 색 이름이 들어간만큼, 영화에서 컬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붉은색과 초록색은 색상환에서 반대의 있는, 보색이다. 영화에서 파란색 혹은 초록색과 더불어 많이 등장하는 강렬한 컬러는 바로 붉은색이다. 붉은 노을 뒤에 녹색광선처럼, 초록 덤불 사이의 붉은 장미라든지, 붉은 셔츠를 입은 친구와 언쟁 후, 현란한 초록 패션의 또다른 친구가 위로해주고 그녀를 따라 바캉스를 떠난다든지. 붉은 자켓, 새빨간 우비, 빨간 비키니 팬티 그리고 파란 스웨터, 파란 원피스 수영복, 초록 모자… 강렬한 컬러의 대비를 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묘미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붉은색이 불운을, 초록색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는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듯 하다. 뜨겁고 강렬한 노을 끝에 숨어있는 녹색 신비를 포착한다. 녹색 광선이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흔히 방황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강렬하게 괴로웠던 바캉스의 끝은 낯설지만 어딘가 통하는 듯한 남자와의 여행이다. 그와 함께 바욘에서 좀 더 머물지, 다시 파리로 돌아갈지 델핀느는 녹색광선에 결정을 맡기기로 한다. 델핀느가 지금껏 원했던 것은 세상과의 연결성이다. 그녀는 여럿이서 있어도 늘 소외감을 느낀다. 세상이 나를 따돌리는 것만 같고, 다 나를 미워하거나 괴롭히는 것만 같다. 녹색광선이 그 연결을 도와주었을까? 그녀는 그저 그를 만나고, 노을이 지는 것을 함께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가 아름다운 찰나일 뿐이지만 우리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영화를 본 모든 관객은 이제 노을을 볼 때면, 노을이 아닌 녹색광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노을이 아니라 노을 뒤에 있을 찰나의 녹색 순간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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