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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an 23. 2018

노을 속에서

무는 해를 바라본다. 지평선 언저리에 머리를 기대고 빛나는 다리를 슬그머니 감추는 모양새가 거대한 문어다. 오늘 하루 은총처럼 내린 대지의 양기를 빨판 속으로 거둬들인다. 그 사이 땅거미와 산머리, 크고 작은 건물에 주황빛 반사광이 아른거린다. 미처 거두지 못한 빛줄기 하나가 거실을 파고들어 축 처진 내 어깨를 감싼다. 피곤을 다독이는 달짝지근한 노곤함이여! 얼마나 은혜롭고 감개무량한 기운인가. 마음을 사로잡는 건 석양볕만이 아니다. 저 멀리에서 성큼성큼 짓밟듯 다가오는 어둠도 있다. 놀란 광채의 문어가 회심(灰心)의 먹물을 뿜는다. 주황빛과 검은빛 사이에서 벌겋고 누리끼리하며 거무스름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빛깔들이 층층이 얽히고설켰다. 사라지는 해 위에 소생하는 암흑. 포근한 난기류 뒤의 시리고 차가운 냉기류. 한껏 숨 고르기를 하다가 태양이 자리를 내어주기 무섭게 자신의 무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이다. 빛이 사라질 무렵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의 영역이다. 하나의 하늘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낮과 밤은 불현듯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교차되는 것이다. 하루 중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유이(唯二)한 시간 중 하나다. 그 심상에서 풍겨지는 따뜻한 서늘함이 바로 저녁 노을의 인상이다.



상이 극단적이라 생각했다. 하늘이 해와 달 중 하나를 허락하는 것처럼. 삶이란 수많은 이분법과 구별 짓기, 편 가르기에 익숙해지는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해가 뜨고 지는 혹은 밤이 오고 사라지는 사이의 기묘한 동거 속에서 종종 넋을 잃는다. 괜히 코끝이 시큰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삶의 회환 같은 것이 아니라 흩어진 감성 파편을 찾은 것처럼 무언가 울컥한다. 석양 아래서 커피 한잔 들이켤 동안 센티멘털해지고 로맨티시스트가 된다. 두 세계의 공존을 목격하는 것으로 감성의 물결이 휘몰아쳐 다양하고 복잡한 심경이 된다. 그때만큼은 뭐든 용서하고 수용할 용기로 충만하다. 오늘의 느낌은 좀 더 진일보한 것이다. 나는 노을이 품고 있는 어떤 서사를 감지해본다. 일시적으로 융합된, 빛과 어둠을 품은 양면적인 자연의 이치는 모순적인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세상은 부조리한 어울림이 내재적 속성이다. 즉, 이치에 어긋나고 도리에 맞지 않는 것 투성이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하고 그걸 이성적으로 따지는 게 무의미할지 모른다. 완벽에 대한 기대는 애초부터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것처럼, 한 사람이 행복하면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 어망으로 얽힌 것이 세상살이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이의 충동이 누군가의 따뜻한 안락함에서 나온다는 이율배반적인 병립이다. 세상은 두 개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의 이치처럼. 그럼에도, 때론 아이러니한 공존을 목격한다. 



는 시끄러운 TV 소리도 스르르 잠이 들었던 엄마를 기억한다. 코까지 골면서 졸기에 전원을 끄면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는데 왜 끄냐고 화를 내던 그녀였다. 다시 켠들 금세 잠에 빠지고 말면서. 그땐 몰랐다. 가족과 함께 북적거릴 땐 늘어지게 하품하고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막상 불 끄고 모두 잠들면 이내 정신이 말똥말똥 해지는, 그녀 같은 나를. 어떤 생각이 잠자기 직전 스스로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다가 후회할 것 같은 공허함이다. 가끔은 그 포근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베리아 벌판 같은 서재로 달려가고 만다. 또, 각자의 일터로 떠난 온 집안을 홀로 독차지하고 콧노래가 절로 나올 때쯤, 어린이집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아이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그렇게 바랬던 혼자만의 시간인데 고독을 불신하는 애정의 갈망이 엄습한다. 가족 중 누군가 귀가라도 하면 반가움에 부둥켜안다가, 잠시 후 아무 데나 벗어둔 양말 한 짝을 발견하고 고약한 성미로 발끈하며 잔소리를 해댄다. 즉, 행복과 화목 속에서도 무언가 공허하고, 함께 있고 싶으면서도 고독을 즐기고 싶으며, 사랑하고 아끼는 와중에 각자의 이기심을 채워야 한다. 하나를 온전하게 채우면 이면의 다른 것이 불쑥 솟아오르는 일상의 아이러니로부터 오락가락한다. 아픈 아이를 사정상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없고, 방학 끝나기 전에 친정이나 시댁 한번 가야지 마음먹지만 끝내 가보지 못한다. 수많은 속사정을 저울질하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녹록지 않은 결정과 책임으로부터 뭔가의 변명거리를 늘어놓는다. 한편으론 누구의 탓으로 밀어붙이거나, 욕 듣는 걸 감수해야 한다. 결국 잘했고 못했나란 반쪽짜리 진실로 인정받는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중간자적인 게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지 모른다.



을 속 빛과 어둠의 공존은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그 자체로 삶을 초월한 무언가로 혹은 비껴간 곳을 향하고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를 벗어나 더 높이 있다.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선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치를 깨닫게 하나, 그렇다고 무엇이 맞고 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 궁금할수록 집착하듯 몰입한다. 많은 이가 마음 한구석에 노을을 품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신년마다 일출 명소를 찾아 나서는 광경을 떠올려보자. 이른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고 해돋이를 놓칠까 노심초사하면서 이동한다. 그때의 하늘은 늦잠 자던 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애써 태양을 숨겨놓은 것 같이 어슴푸레하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안 보고는 올해의 운세와 직결된다. 하늘의 낌새로 의기소침하던 그때, 칠흑을 뚫고 손톱만한 해의 머리가 서광처럼 비추기 시작했다. 새초롬하게 소심했던 노란빛이 점점 정열과 희망의 붉은 노을 끝에 해돋이가 된다. 어둠은 의기양양한 햇볕에 살포시 하늘을 내주고 전왕(前王)의 체통을 지키며 슬금슬금 물러난다. 빛이 더해질수록 사람들 함성도 짙어진다. 완벽한 황홀경과 희열이 앞으로의 성취에 대한 기대감을 선사한다.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 없이 잠시 동안 모든 희로애락이 맞물린 합일이다. 그 흥분과 감동은 오롯이 빛과 어둠의 완벽한 공존이기에 설득력이 생긴 것이다. 이때야 말로 삶의 선택과 후회에서 한발 물러서 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연과 혼연일체 되어 관망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만물과의 일체감, 일상으로부터의 초월감, 뭐든지 도달할 수 있는 긍정성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 순간이 인생에서 얼마나 될까? 정화 작용으로 불순물을 걸러내고 의기충만 해진 자는 그렇지 않은 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유연하고 관대해진 시선으로 미처 알지 못했던 희열을 꿀물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단 한 번이 아니라 습관적인 목격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연중행사가 된다.



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온 세상을 환히 비추면 하루가 시작된다. 특별한 시작도 일상은 결국 똑같다. 다시 무언가를 선택하고 후회하며 위로할 시간을 맞이한다. 희망찬 카타르시스 후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이 몰려와 유난히 더 피곤해진다. 갑자기 밀려온 시장기를 느끼며 일찍부터 문을 연 가게가 있을까 검색한다. 이른 새벽부터 서두른 탓이라고 위로하면서. 무대가 꺼지고 객석에 불이 들어와 현실로 되돌아올 때의 헛헛함 같은 게 밀려온다. 매일이 그렇게 차오르다가 가라앉는 덧없는 수레바퀴다. 그러나, 순식간에 지나친 공존의 여운은 길다. 달콤하고 짜릿한 환희와 잔상으로 이따금 되살아난다.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 새벽녘 차 안에서 실낱같은 섬광을 마주한다면, 혹은 초저녁 붉은 머리를 빼꼼히 내민 문어의 광채에 따뜻해진다면, 그렇게 상기될 수 없다. 


 





이따금 노을 속에서 한 템포 쉬었다 일어서는 삶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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