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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r 09. 2018

겨울이 지나지 않고 봄이 오랴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두꺼운 패딩 안에 얇은 걸 하나 더 껴입었는데도 쌀쌀했다. 아이들에게 비비적거렸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성에 차지 않아 커피를 내리고 마시길 반복했다. 순간적인 온기는 잠시 온몸을 나른하게 했으나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여전히 한 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몸속 어딘가에 빨대가 꽂혀 묵혔던 체지방마저 쭉쭉 빨리는 듯했다. 무언가 덧대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맴돌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 하나 쓸 수 없는 무소불능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 공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전적으로 절기와 날씨 탓이었다. 옴짝달싹하기 힘들 정도로 덥거나 추워서 그동안 성실했던 이들에게 약간의 일탈이 허락됐다. 휴지기가 찾아오고 각자의 쉼터로 돌아갔다. 계절적 변화는 나비효과처럼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불러들였다. 누군가는 감내해야 했다. 그게 주부의 몫이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에게 허용된 자유를 지켜줘야 했다. 물론 함께 보내는 건 행복했다. 학원과 숙제에 대한 강요를 영화 관람하고 쇼핑하는 것으로 풀었다. 오늘 일정을 점검하는 대신 뭐가 웃겼는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서로의 위시리스트를 나누는 동안 소원했던 감정들을 이어갔다. 딸아이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일기장에 담아냈다. 이 바람직한 에피소드를 귀가한 그에게 들려줬다. 일면만 놓고 본다면 가족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일상은 이상적인 드라마가 아니라서 부조리극의 독백도 출몰했다. 가족의 보상 같은 휴가에 자유를 바친 나는 잠깐 동안의 여유를 그리워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시원히 내뱉으려는 족족 망설였다. 내일이 없는 듯 활기찬 아이들을 보면 참고 말지가 절로 나왔다. 나만 내색하지 않으면 집안 공기는 평온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아이들과 뒹굴면서 더 크게 웃고 잠시 힘이 빠질 때면 아들에게 달려가 부둥켜 앉았다. 욕망을 접어두는 건 얄궂은 체증을 쌓았다. 가끔씩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장난감과 책으로 어지럽힌 거실 한 구석을 발견할 때면 꾹꾹 눌러 놨던 언짢음을 단전부터 끌어올렸다. 입에 담은 적 없었던 걸걸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에 풀리지 않아 모두 각자의 방으로 내쫓고 말았다.  



제야 나는 외쳤다. “내가 바랬던 건 더도 말고 하루에 딱 한 시간이었다고.”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빈둥거리던, 목욕을 하던, 쌓아둔 책을 읽던, 방해받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불가침 영역을 원했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쓰다 만 글이 매듭 되지 못하고 며칠 째 방치된 채 있다. 그게 머리 한 편에 자리 잡아 설거지를 하면서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 중이었다. 딱히 결론 나지 않으니 써봐야 알았다. 경험상 글은 머리나 가슴이 가자는 대로 언제나 따라가는 게 아니다. 머리가 소재를 찾고 가슴이 껄끄러운 무언가를 캐내야 손이 섬세한 결로 단어를 붙여간다. 삼박자로 합주하듯 매끄럽다가 클라이맥스에서 꽝 하는 울림을 분출해야 한다. 내 속에선 무언가를 끊임없이 복기하고 있는데 발설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걸 해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 마음은 급하고 손이 근질근질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딸아이가 학원에 갈 시간에 아들을 낮잠 재우자. 그런 날엔 아이는 더욱 산만하고 발랄했다. 그렇다면,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은 어떨까?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지낸 나머지 체력마저 방전된 걸 핑계 삼았다. 불만과 좌절로 희생양이라고 징징대고 있다. 혹자는 내가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타박할지 모른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건 좀 더 극성맞은 열정 일지 모른다. 이혼 후 딸아이를 돌보며 식탁 위에서 <해리포터>를 완성했던 ‘조앤 K. 롤링’처럼 말이다. 불가능한 일을 해낸 거니까 대단한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할 건 하되 하고 싶은 걸 소신대로 밀고 다가는 배짱이 없다.    



국 내 체증은 글에 대한 욕망이자 갈증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예민하다. 확신에 비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삶을 조금씩 실행하면서 어쩌면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언젠가 책을 내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그럼에도 떳떳이 내세우지 못한다. 한참 작업 중일 때 지인이 연락 와서 뭐해하고 물어도 어물적거린다.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고 밝히지 않는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지닌 무겁고 진중한 면모에 비해 나는 한없이 부족해서 의기소침해진다. 누구나 쓰고 올리는 플랫폼에서 흔한 어중이떠중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글을 쓴다고 해서 특출한 문장력이나 특유의 장악력이 없을뿐더러 의욕만 앞선 습작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뭐라고 호기롭게 말할 수 있을까? 궁색한 변명은 아마도 과거의 사건과 연관될 것이다. 질책과 여러 종류의 비웃음을 견뎌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노트북 열기가 두려웠었다. 가망 없다고 좌절했다. 그때마다 책 속에 숨어서 행간의 의미를 더듬었다. 필사하고 울컥한 무언가를 메모했다. 끄적거린 걸로 한 면을 채워나갔다. 습관이 되고 파일이 쌓일수록 뿌듯한 게 밀려왔다. 홀연히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팔딱거리고 쫄깃한 질감을 처음 느꼈다. 형편없고 별 볼일 없어도 글 쓰는 순간이 짜릿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희열 중 으뜸은 구속에 굴하지 않는 자발적인 만족이다. 달콤한 꿀물을 맛본 자는 멈출 수 없다. 질시와 비판이 있을지라도 온전히 나만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쫓을 수밖에 없다. 항상 그 순간을 갈망한다. 진짜 속마음은 나만의 공간에서 하루 종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몰입하고 싶다. 간절하다 보니 모든 걸 내팽개치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래서, 나는 일종의 원칙을 정했다. 글보다 엄마와 아내의 역할이 먼저라고. 그와 아이들이 각자의 일터에 있을 때 내 시간을 허용하겠다고. 내가 필요한 이들에게 소홀하고 싶지 않다. 그들과의 삶과 추억도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먼저 주어진 의무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시간에 순결한 욕망과 진정한 탐구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그 결실이 무엇보다 달콤할 것이라 믿는다. 이 신조는 대체로 유효하다. 애들은 밥 하는 엄마에 익숙하지, 글 쓰는 엄마를 알지 못한다. 그 모습을 부정하진 않는다. 단지 하루 종일 뒤치다꺼리에 시달려야 한다면, 감내하는 것에 비해 원하는 바를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참기 어려운 한계에 도달한다. 인내의 체증이 쌓이고 글에 대한 갈증이 엄습하며 깊은 시름에 빠질 때쯤 급기야 짜증과 분노로 치닫는다. 언제 찾아올까? 충만한 만족과 즐거움이. 이러다가 그동안 몸에 밴 습관이나 감마저 잃는 게 아닐까? 못다 이룬 내 앞날이 쌓이기도 전에 한 줌의 재처럼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그 상심으로 가족에게 버럭 화내면서 곧바로 이러면 안 되는데 후회한다. 희망이 까마득히 멀다고 투덜댄 근시안적인 성질 머리를 탓한다. 별 볼 일 없는 나란 자책 모드로 빠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따듯한 구석 없는 냉정한 현실의 한기가 파고들어 온몸을 오돌오돌 떨리게 한다. 그게 나를 허탈하게 한다.  



 빈 내 가슴속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칼바람이 도무지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대로 휩쓸리는 게 아닐까 착각했다. 한편으론 그런 일상에 떠밀렸고, 흉금 속 날 선 욕망을 다독이고 있었다. 용기 없고 짜증스러웠지만, 고비마다 마음을 부여잡았다. 묵묵히 견딘 건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매서운 추위는 포근한 온기가 닿자 조금씩 자리를 내줬다.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었을 때, 조심스레 기웃대는 파리 한 마리를 보았다. 대뜸 이 놈의 파리라고 했지만, 벌써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예전 일본 시간에 배운 봄기운이 완연해졌다(はるめいてきた)는 표현이 떠올랐다. 끝나지 않을 듯 절망스러운 겨울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밀려났다. 멀리 있어 비현실적인 것 같던 봄이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그 절기는 따스한 감각만큼이나 새 출발을 불러온다. 보편적으로 희망, 행운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만, 지금의 나는 쨍한 맥주 첫 모금을 들이켠 후련한 기분이다. 숨통이 트인 듯 목 타게 했던 갈증과 묶은 체증을 날려 보낸다. 드디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새 학기가 돼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아들과 헤어지던 순간, 
 울먹거리는 그와 달리 환하게 돌아서는 나입니다.
 출발과 재 시작의 신호탄이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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