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건 & 라스트 오브 어스
피는 물보다 진할까. 현대사회에 이르러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무너졌고, 사람 간 관계도 파편화되고 단절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각종 매체의 콘텐츠에서는 유사 가족을 표방하며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이들에 대한 내용이 화두가 된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미운우리새끼>는 해체된 가족 관계를 다시 덧붙인다. <나 혼자 산다> 역시 홀로 사는 사람들이 관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을 조망한다. 관계가 해체된 자리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서로의 연결점을 찾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늘 허전한 자리를 채우는 충만한 관계를 갈망한다. 그 욕망은 어떻게든 세계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발현되어 왔다. <로건>은 관계에 대한 욕망을 충실히 반영한 영화다. 액스맨 트릴로지의 독보적 캐릭터 '울버린'에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지우고 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사람의 원초적 바람이 새겨져 있다. 명확히 표현하자면 가족애,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되어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2시간 남짓의 러닝 타임 동안 엑스맨의 ‘울버린’이자 제임스 하울렛이며, 로건이라 불리는 남자의 관계를 스크린을 통해 바라본다. 노쇠한 찰스 자비에를 대하는 연민 어린 손짓, 자신과 몹시 닮은 소녀 로라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 관계의 소용돌이 속 로건은 종단에 이르러서야 그 무게를 받아들인다. 살아남기 위해, 또 로라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맞서는 로건의 모습은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 치환된다.
이처럼 부성, 모성처럼 사람의 본능을 건드리는 감정을 다룬 작품들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로건> 개봉과 함께 수 차례 언급됐던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가 그랬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퍼져 황폐화된 미국을 배경으로,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중년 남성 조엘과 소녀 엘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은 돌연변이 히어로도 아니고 초능력도 없다. 그러나 그들 앞에 던져진 환경은 <로건> 못지 않게 잔인하다. 어찌 보면 더 가혹할지도 모르겠다. 규범과 무규범이 뒤얽혀 나뒹구는 세상 가운데 불특정 다수의 사냥감이 되어 살아가니까.
이 작품의 인상적인 지점은 너티독이 관계를 조망하는 방식이다. 메인 캐릭터인 조엘과 엘리의 감정 변화를 다양한 주변 인물을 통해 비춰준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뿌리와 연결된 중심 몸통은 조엘과 엘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뻗어나간 가지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속에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다. 이들은 따로 떼어 볼 수 없으며, 한데 모여 ‘생존’에 매달리는 처절한 인간 군상을 이룬다. 그 틈바구니에서 조엘이 엘리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야말로 ‘원초적인 것’이다. 특히, 그가 아버지였던 남자였기에 더욱 더.
*아래부터는 각 작품의 핵심 내용이 언급됩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두 작품에는 분명 공통점이 많다. 중년 남성이 소녀를 지켜내는 내용을 골자로 갖가지 위험한 상황을 배치한다. 배경은 다를지언정 <로건>과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듀오 모두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다. 거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와 소녀가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낀다는 점도 같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로건>은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남자의 모습을,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아버지였던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는 남자의 변화를 담아낸다. 결국은 부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지는 모르나, 이 간극은 두 작품의 시나리오를 풀어나가는 방법론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심지어는 결말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로건은 영화 초반, 로라의 존재를 부정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닮은 로라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고 어떤 형태로든 책임감이 부여되는 상황을 피한다. 멕시코 간호사가 남긴 실험 기록에서 ‘제임스 하울렛’이라는 이름까지 발견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다. 한편으로는 그간 자신이 소중히 생각해왔던 사람들은 모두 다 ‘험한 꼴’이 되어버렸기에, 로라는 그런 꼴이 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생 느낄 수 없었던 ‘가족’이라는 관계를 경험한 후 로건의 마음 속 쐐기는 헐거워진다. 그리곤 이내, 자비에 교수의 죽음을 목도한다. 이 순간 그의 방어기제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절대적 존재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존재가 사라지고, 로건은 아버지로서의 운명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처럼 살지 말라’며 로라를 보내는 순간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조엘은 로건보다 일찍 엘리를 인정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아버지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어린 소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어떻게 해야 불안으로 요동치는 딸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지 아주 잘 안다. 그래서 조엘의 감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불특정 다수의 생존 대신 엘리 곁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엘리는 아버지가 필요한 아이이고, 조엘이 없다면 삶을 포기할지도 모르니까.
상황은 다르지만 같은 성질의 갈림길 앞에서 로건과 조엘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둘의 선택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어려워도 호불호는 갈린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로건의 방식이 아쉽게 느껴질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조엘의 선택에 탄식이 비집고 나올지 모른다. 다만 <로건>과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모두 상당한 수작이기에 각자의 감정에 몰입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두 작품을 모두 접한 후에는 알게 된다. 결국 결론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아버지는 딸에게 방패가 되어주려 한다. 그 방식이 죽음이든 머무름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