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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글빵

미야의 글빵연구소 1기 졸업작품

by 회색토끼

딸랑.


오늘도 경쾌한 방울소리와 함께 세탁소에 입성했다. 나는 또다시 세탁소의 주인과 마주쳤다. 늘 신원을 알 수 없도록 남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머리에 반짝이는 별핀을 달고 있었다.


“핀이 참 예뻐요.”

“저보고 이런 세탁소나 운영한다며, 처음엔 사람들이 별꼴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제 명함을 드려도 될 것 같아서 드려요. 오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명함에 뒷면에는 귀여운 여자애가 머리에 별을 단 채 다이아몬드를 세공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미야…? 특이한 이름이네.’


나는 다시 한 번 명함을 살펴보다가 이내 곧 주머니 속에 슥 넣었다.

그대로 내 방에 들어와서 책상에 앉았고, 서랍을 열어 내가 가장 아끼던 깃펜을 꺼냈다. 깃펜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가려는데 문득 조명에 비쳐 깃펜 촉이 순간적으로 더 빛나는 듯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써볼까.”


아이를 위한 동화를 한 편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옛적, 털이 하얗고 복슬복슬한 토끼가 살고 있었다. 토끼는 당근을 캐야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당근을 캐러다녔지만 안타깝게도 하얀 털은 점점 때가 타서 회색 토끼가 되었다.

어느 날, 토끼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에 안개처럼 낀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있었다.


“이런 연하일휘가 또 있을까.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나도 다시 아름다웠던 하얀 토끼가 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


때 마침 옆에서 칡을 캐고 있던 조선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저기 산 너머 고요한 동산오즈의 마법사가 살고 있다고 하던데? 찾아가 봐. 도움을 줄 거야.”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너도 이 나이만큼 살아봐. 아는 게 많아질걸.”


우문현답이었다. 토끼는 그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고요한 동산을 향한 여정을 떠났다. 한참을 하염없이 깡충깡충 뛰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뭔가 먹을 만한 곳이 없을까 싶어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간질였다.


“이건 어디서 나는 냄새지?”


냄새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방앗간이 나왔다. 방앗간에서는 깨를 볶고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 계세요?”

“이 시간에 토끼라니. 무슨 일이지?”

“… 배가 고파서요.”


그녀는 싱긋 웃더니 안쪽에서 들기름에 당근을 들들 볶아 훌륭한 당근볶음 한 접시를 내놓았다.


“방금 짠 기름으로 볶았으니 더 맛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여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토끼를 바라보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꺼번에 주지 않을래? 내 이름을 기억해줘. 박영선이야.”

“…그럼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를게요.”

“그래. 네가 어떤 이야기를 들고 올지 기대되는걸.”


토끼는 그녀가 내어 온 당근볶음을 단숨에 비운 채 조용히 접시를 내려놓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 토끼를 위한 그녀의 마음도 느껴졌다. 괜히 눈물이 나면서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눈물과 미소가 공존할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다.


“너무너무 맛있어요!”

“너의 여정을 응원한다. 가는 길에 어려움에 처한 이가 있다면 외면하지 말고 꼭 도와주도록 해.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토끼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토끼는 그렇게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다시 그 동산을 향한 여정을 계속했다.



스륵스륵-

어디선가 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는 그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호기심이 당겼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무작정 향했다. 어떤 남자가 앞치마를 한 채로 칼을 갈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유려했다.


“안녕하세요. 웬… 칼이에요?”

“엇, 안녕? 귀여운 토끼네. 내일 100인분 요리를 해야 해서 미리 칼을 갈고 있었어.”

“100인분이 나요…? 셰프님이신가요?”

“맞아. 나는 글방연구소 수강생들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호주아재야.”


그때였다. 뽀각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는 아연실색하여 부러진 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어쩌지. 이 칼이 없으면 요리를 할 수 없는데.”

“다른 칼은 없으세요?”

“있지만… 내 영혼과 교접한 칼은 이 친구가 유일해.”


토끼는 괜히 자신이 말을 거는 바람에 그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으음…그럼 저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님을 찾아가 보지 않으실래요?”

오즈의 마법사?”

“네! 그분은 뭐든 다 도와주실 수 있다던데요? 저도 그분께 찾아가는 길이에요. 고요한 동산에 사신대요.”


그는 무릎을 탁 치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은 우리 연구소 부반장님이셔! 내가 정확한 위치를 아니까 같이 가보자.”


그는 부러진 칼을 소중하게 보자기에 담았다. 그렇게 호쾌하게 봇짐을 메고 토끼와 발걸음을 나란히 했다. 그는 다방면으로 재주꾼이었다. 특히 노래를 잘 불렀는데, 자신의 자작곡이라며 줄줄이 테이프처럼 계속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덕분에 혼자여서 적적했던 토끼는 금세 마음이 따뜻해졌다.





“흐음… 여기서 더 어떻게 쓰지? 쉽지 않네.”


동화로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이것이 동화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유연하게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목에 뭐라도 걸린 듯 글맥이 막혀버렸다.


“인물을 몇 명 더 추가하면 좋을 텐데.”


나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들고 관계도를 그리며 이리저리 선을 잇고, 또 이어보았다.


“이렇게 막힐 땐… 정윤 작가님한테 여쭤봐야지. 그분이 소설을 잘 쓰시니까.”


그렇게 아무렇게나 휘갈긴 습작들이 낱장의 종이로 널브러진 모습을 보니 또 글밥상인 것처럼 보였다.


모든 날 다 완벽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초안을 작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처럼 쓰다가 중간에 막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이 싫지 않았다. 토끼가 가는 여정처럼 고되지만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는 설렘이 더 컸다.


“토끼는… 내일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재미있는 여행을 떠나는 걸로 하자.”


나는 얼핏 시계를 보고 이젠 집에 가야 할 시간임을 깨달았다.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는데 시간이 훌짝 흘러있었다.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하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왔을 때 주인이 슬쩍 웃으며 내게 봉지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빵이에요. 지금 막 구워서 맛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때 마침 머리를 쓰느라 당이 떨어졌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봉지 안에는 갈색빛깔로 잘 구워진 동그란 빵이 들어있었다. 나는 냉큼 한 입 베어 물었다. 은은한 버터향과 함께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묘하게도 고소한 당근볶음을 먹던 토끼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런데… 이건 무슨 빵인가요? 엄청 맛있는데요.”


주인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 글빵이에요. 그동안 당신이 썼던 글을 발효시켜 만든 거라 더 맛있을 거예요.”




이 글은 미야의 글빵연구소 졸업작품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모든 수강생들 이름을 다 넣을 순 없었기에 같이 수강하면서 공모전 준비하셨던 모든 분들의 이름을 넣은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중간에... 좀 이상한 문장이 있다면 이름을 넣기 위한 노력임을 감안해 주세요.

특전으로 반장님인 블라썸도윤님도 넣고 싶었지만 제 능력으로는 블라썸도윤을 그럴싸하게 집어넣기가 힘들었어요. 등장 못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반장님은 제 마음 속에 있는 걸로...♥


글빵연구소 연재하시느라 가장 고생하셨던 미야 선생님. 세탁소의 주인장이셨습니다. 두둥 탁. 처음에 별단미야를 오마주 했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달단 미야랑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웹소설 공모전으로 현망진창이라 졸업작품 제출이 늦어졌습니다.

이 또한 죄송고 다른 수강생분들께도 한 자락 미소로 남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졸업식날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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