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패왕별희> 국립극장 달오름 (4/6)
장국영의 열렬한 팬인 나는, 4월만 되면 가슴이 아파온다.
과연 올해도 그를 기리는 상영회가 있을 것인가...내 여건에 그걸 보러 갈 수나 있을 것인가..이렇게 레슬리 없는 한 해가 또 가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한 주 정도 우울하다.
당연히 <패왕별희>라는 제목을 봤을 때, 어떤 식로든 장국영과 연관된 내용이겠거니 생각했다 (팬심이 이렇게 무서운 법이다).
보기 전의 마음이야 어떻든, 이 극은 영화 '패왕별희'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작품은 초한지의 패왕 항우와 우희를 다룬 중국 비극이다. 본래 경극이라는 틀을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창극으로 바꾸었다.
한글과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자막보랴 배우들 보랴 눈이 바쁘다(어쩌다보니 배우가 대사를 한뭉텅이 빼먹는 게 생생히 중계된다). 그래도 판소리 극의 경우에는 워낙 꺾는 소리와 고어가 많아 자막 없이는 반도 못 알아 들었을 것이다.
극은 매력적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구성진 소리와 고전의 낯선 어조를 듣는 것 만으로 공연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어진다. 패왕 옷을 입은 손자를 찾는 맹인 노파가 오강에 얽힌 사연을 푸는 것으로 시작한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조명이 변하고 휘황한 자태를 한 패왕 항우가 등장한다.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주는 장치는 묘한 효과가 있다. 용맹한 장수들이 한바탕 싸우는(싸웠던) 장소는 사실 남루한 노파가 허둥지둥 배회하는 빈 강터에 다름 아니다. 도입부에서 이 모든 게 가고 없는 옛 혼들의 이야기라는 걸 강조할 때 드는 쓸쓸함이 항우의 화려한 풍채를 보면서도 밑바닥에 깔려 있다.
중국 비극은 접하기가 쉽지 않은데, 애초에 중국 희곡 자체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익숙한 건 서양의 셰익스피어다.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결말이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패왕별희>나 셰익스피어나 비슷한 것 같은데, 그 기상이 전혀 다르다. 중국의 호방함 때문인지 <패왕별희>의 본 서사인 초한지나 삼국지에는 수 많은 비극적 일화에도 불구하고 서양 비극의 좀스러운 느낌이 없다. (변명하자면) 주인공들의 개인성, 또는 윤리적 선택에 대한 내적 고뇌같은 것이 없다.
중국 고전의 특징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물들이 보잘 것 없는 육신보다는 대의가 몇 배 더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자신보다 높은 존재는 신이 아니라 하늘이다. 신보다는 더 넓고 무심한 개념이다.
이러니 개인적인게 세상 없어도 중요한 요즘 시대에 인기가 있을리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때문에 이런 인물들이 신선하다. 요즘 와서 누가 천하를 차지할 임무가 자기에게 달렸다고 믿을까?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게 달렸고 자신은 그닥 소중하지 않다는 생각 덕분에 이들은 거리낌 없이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다. 이 방대한 기백! 주저하지 않는 패기!
물론 이런 인물들은 평면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패왕별희'가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 항우는 어리고(26세!), 어리석고, 가장 입체적이다. 유방이나 장량 등 닳고 닳은 인물들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순진한 영웅이었는지 생각하면 탄식이 나온다.
가장 낭만적인 대사 '세상을 뒤엎는 영웅이면 무엇하리. 사랑하는 이 한명도 지키지 못하거늘...'는 중국 영웅들이 속되다고 희생시킨 인간미가 그를 지금까지도 한 캐릭터로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고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제 야심은 이해 할 수 없어도 사랑 이야기에는 한없이 취약하다.
각설하고, 내가 제일 말하고 싶었던 주제로 넘어가자. 우희에 대한 것이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작중 우희 역할을 하는 이는 남자다. 목소리나 어깨선 등으로 금방 태가 난다. 그러면서도 우미인으로서의 손짓이나 자태는 곱고 어여쁘다. 이 남성이 연기하는 우희는 의심할 나위 없이 여자고, 패왕의 애첩이다. 그의 중성적인 간드러짐이 작품 매력의 6할 정도를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여기에는 분명 퀴어적요소가 있다.
영화 '패왕별희'와 이 작품이 만나는 것도 그 지점이다. (여전히) 여자 역할을 남자가 한다는 것. 나는 저 고운 우희를 다시 보기 위해 몇 번이고 재관람할 의향이 있지만 극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동안 들었던 생각은 하나 뿐이다. 왜 우희 역할을 남자가 해야 하나?
지금 와서, 능력 있는 여배우들이 넘쳐나는 데도 우희를 남성이 맡은 이유를 짐작하자면, 그게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지극한 여성성은 모순적이게도 남성의 연기를 통해서만 완벽해 보인다. 여성은 절대 완벽히 아름다울 수 없다. 남성은 교태로운 몸짓, 가녀린 목소리와 하얀 분장으로 아름다움을 연기하면서도 여성의 육체가 주는 미천한 느낌은 피할 수 있다. 그의 완전무결한/무성적인 아름다움은 유교 질서가 여성에게 도달하길 강요했던 경지다.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의 삶이 기구한 건 남자로 태어났을망정 우미인을 완벽히 연기하라는 폭력이 그의 정체성을 망가뜨렸기 때문 아닌가.
청데이가 겪은 학대는 그 옛날 중국 무대에서 여자의 지위가 무대에 설 수 없을만큼 형편없어서지만, 여성의 상황이 놀랄만큼 향상된 지금도 성性을 둘러싼 무대 미학은 여전히 복잡하다. 여장남자가 아름다우면 남장여자도 그만큼 아름다울까? 우희를 남성이 맡는다면 항우를 여성이 맡을 수 있을까? 정치적 목적이나, 분노에서 기반한 변주는 별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성이 여성성을 분장한다면 여성도 남성성을 탁월하게 흉내낼 수 있을까? 영웅의 기백을 여성이 맡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까? 의심하기 이전에 아무도 그런 시도를 않으니 나는 도통 모르겠다.
우희에게 매혹되면서도 반감이 드는 건 그 와중에 <패왕별희> 안에서 비중있는 여성 인물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연급 인물인 여치의 캐릭터성은 한 줄로 정리되는데 '여성이면서도 천하를 탐내고 동시에 항우의 유일한 사랑를 받는 우희를 부러워한다.' 고루하고 평면적이다.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열세명의 인물 중에 여자는 노파와 여치 둘이고 그 중 그나마 자기 얘기를 하는 건 여치 하나다. 그런 와중에 가장 중요한 여성 역은 남자가 맡아 하고 있으니, 그것도 훌륭하게!
이런 성비의 불균형은 <패왕별희>무대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더는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우희를 남성이 맡는 이유가 분명 있을텐데, 그게 젠더 구분을 모호하게 해서 관객에게 묘한 쾌감을 주기보다는 전통에 기대어 주어진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불만이 든다.
이 작품이 지금 시대와 연결되려면 새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내 크나큰 이상은 유방이나 장량을 여성이 분하는 것이지만, 그건 너무 요원한 일이고 우희 역을 본래대로 여성이 맡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고사 속 인물들이 얼마나 단순하고 낡아빠진 이상 속에 사는지 드러날 것이다.
<패왕별희>의 목적이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중국의 오랜 고전을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이라는 건 나도 안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대개 본래의 고상함과 장엄함을 잃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고전은 의미는 언제나 현재와의 관계에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공연이 지닌 힘은 당연히 남자/여자라고 가정하는 인물을 다른 성별에게 부여하는 것만으로 낡은 이야기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맹인 노파의 역할은 이 모든 일이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는 걸 부각시키지만, 나는 아직도 이 오래된 고전에서 무수한 가능성을 보고 낭랑한 목소리의 항우를 기대한다. 그 쾌감을 상상하면 장엄함은 잃을 가치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