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데모크라시> 리뷰

서울 연극제 선정작 <데모크라시>,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5.18)

by 김나은

돈이 다 떨어졌다. 이젠 정말 걸신들린 것처럼 연극 보러 다닐 밑천이 없다. 여름이면 연극계도 비수기에 접어든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가장 최근에 본 <프라이드>의 리뷰는 이미 썼고, 한참 전에 종료된 연극들의 리뷰를 쓰는 걸로 씁쓸한 마음을 달래야겠다.

그런 고로 이번 리뷰는 관람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데모크라시>다.


'민주주의'라는 거창한 제목과 210분이라는 긴 공연시간, 호평으로 넘치는 팸플릿 덕에 나는 단단히 기대를 하고 갔다. 그런데 내가 빌리 브란트나 독일 역사에 문외한이라는 게 연극 보는 데 그렇게 방해가 될 줄이야.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건 사전 지식 없는 내 탓이라 치지만, 못마땅한 건 연극의 주제의식이 어딘지 한물 간 구식이다. 50년 전 독일 정치 상황을 2019년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그만한 시의성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연극이 현실과 연결되는 방식은 묘하다.


주인공인 빌리 브란트는 좌파의 수장, '바른 정치인'이다. 민주주의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기욤은 그런 (사실 동독의 스파이지만) 빌리의 개인 비서로서 성실히 보좌한다. 빌리를 음해하려는 하이에나들이 넘치는 정치판에서 둘의 사이는 각별해지지만 결국 기욤의 정체가 드러나고 빌리는 모함과 비난에 못 이겨 사퇴한다. 머나먼 독일에서도 정치판의 서사는 매한가지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이 갈등은 자주 선과 악의 대결처럼 묘사되는데 진부할 뿐만 아니라, 이분법을 이용해 다양성을 가린다는 점에서 반反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데모크라시>의 단점이 바로 그거다. 기욤과 빌리의 우정과 정치에 대한 이상은 50년 전에나 낭만적으로 보일 것들이다. 여배우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정장 입은 열댓 명의 중년 남성들이 정치와 민중에 대한 틀에 박힌 말들을 하는 걸(대중은 개, 돼지와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뭐든지 믿지요 등등) 2시간 넘게 보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인물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얼마나 열심히 자유를 떠들어대건 작품이 여성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민주주의 감수성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여성은 빌리의 잠자리 상대, 성희롱, 성추문의 대상으로만 언급된다. 여성들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요구의 '목소리들'은 그게 얼마나 빌리를 피곤하게 하는지 탄식하는 기욤의 걱정거리일 뿐이다.


남성 연대의 끈끈한 우정에 좀이 쑤셔올 때쯤 나는 저 둘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들었다. 선하고 곧고 열린, 진보 정당의 대선주자와 그를 보좌하는 개인 비서. 안희정 전 지사 성폭행 사건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수행비서가 여성이냐 남성이냐 따라 이야기가 이렇게 다르게 흘러갈 수가. 와인을 앞에 두고 나누는 자유와 이상에 대한 논의, 대선주자를 보좌하며 자신이 어떤 중대한 변화를 일궈내고 있다는 느낌 등은 여자 수행 비서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데모크라시>의 세계에서 여성은 일단 수행 비서가 될 수도 없다.


대목을 장식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빌리는 몰락하고 장벽은 무너진다. 당연히 벽인 줄 알았던 무대의 회색 뒷면이 웅장한 굉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곳에서 눈부시게 환하고 따듯한 노란빛이 나와 사방을 물들인다.

극적 효과라는 게 뭔지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내가 투덜댔던 모든 결점을 용서하고 싶어 진다. 내가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엉덩이가 눌어붙게 앉아있었구나 하는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자유를 갈망하고 억압에 저항하는 행동이 만든 역사 앞에서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장벽이 무너진 게 중요하지 다른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두근거림으로 극장을 나온다.


<데모크라시>의 주인공은 그 당시의 정치인들이다. 그래서 관객은 지금의 민주주의를 그들에게 어느 정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주객전도는 항상 조심해야지.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없다. 탁자에 둘러앉은 정장의 중년 엘리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깡마른 젊은이가 최루가스 가득한 거리를 내달리며 부르짖는 민주주의는 같지 않다. 빌리 브란트가 성추문과 무능함으로 저들만의 심판대에 오르는 동안 벽 밖에서 외치는 '끝없는 요구의 목소리'가 너무 벽에 금을 내고 결국에 무너뜨렸다고 받아들이는 게 더 알맞아 보인다.

세상의 장벽들은 사실 카드 피라미드처럼 이루어진 게 아닐까. 베를린의 높고 견고한 장벽이 무너졌으니, 남은 건 그 벽을 받치고 있던 벽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는 일이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노력은 절박하다. 이 연극이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되던 순간을 보여준다면, 민주주의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끝을 향해 가는 걸까 아니면 아직 시작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걸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제 서로 자신들 앞의 장벽을 부술 수 있을 만큼 목소리를 얻었을까?


내가 얼마나 노려보더라도 제목은 여전히 <데모크라시(민주주의)>다. 이 기만적인 제목 앞에 나한테는 생각할 거리만 남았고, 공연은 5월 22일을 끝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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