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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Oct 10. 2024

삶을 라이브공연처럼 멋지게 탐험하는 TCK남매

아프리카 케냐와 짐바브웨에서 자란 Shimblings 건희님&주희님

    건희 님은 나의 첫 회사에서 만났던 동료였다. 당시 팀에 새로이 합류한 인턴이었던 건희 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가 아프리카에서 거주하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웠고 내심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다만 부모님이 거주하실 동안 대학교 휴학을 하고 가서 일 년 동안만 아프리카를 겪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케냐와 짐바브웨에서 인생의 반 이상을 산 “찐”이었다. 짐바브웨는 나 역시도 여행을 했던 곳이라 어느 정도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했던 짐바브웨는 철저하게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고, 여행의 기간 역시 짧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만에 건희 님에게 연락을 했고, 인터뷰 요청을 하며 한 가지 제안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건 바로 그의 인스타그램에 종종 등장하는 그의 동생, 주희 님을 함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늘 에너지틱한 건희 님의 사진 속 (대부분) 빨간 머리와 밝은 표정으로 등장하는 그의 동생분이 궁금했다. 성인이 되어서 남매가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것도 신기했지만 사진으로부터 느껴지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분명 그 남매의 성장과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다. 그 에너지는 흉내를 내기 어려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 긍지와 밝음, 그리고 컬러풀함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인터뷰를 응해주신 두 분 덕에 이번 기회를 통해 다이내믹한 그들의 성장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것뿐만 아니라 내가 사진에서 느꼈던 아프리카의 강렬한 햇살처럼 열정적이고 다이내믹하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 답변을 정리하며 문장 사이사이의 생동감과 흡입력 덕분 나 역시도 함께 짐바브웨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나는 두 분의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결정하는 이유는 자식에게 더 좋은 환경과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만, 특히나 견고하면서도 넓은 가치관으로 자녀들이 어려울 수도 있는 타지에서의 생활을 최대한 누리고, 악기 및 외국어 역시 가르쳐 삶을 다방면으로 탐험할 수 있게 해 준 것, 한국과는 많이 다른 사정의 국가에서 안전한 보금자리와 끈끈한 가정을 유지한 것, 세계는 넓고 각자 더 큰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심어준 가치관 등이 참 멋지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가 앞으로 나의 자녀를 어디서 어떻게 키울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도 물리적인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나의 건강한 가치관을 잘 세우고 크고 다양한 것들을 잘 담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멋지고 귀한 인터뷰였다.  



Part I. 케냐와 짐바브웨에서의 유년기 & 청소년기 

심건희 님과 심주희 님 

 1. 안녕하세요, 건희 님 & 주희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Shimblings입니다! (Shim+siblings) 케냐와 짐바브웨에서 살다 온 Ghun & Joobo라고 합니다. 


건희: 현재 한국에서 무역 플랫폼 회사를 다니고 있는 35살 심건희라고 합니다.

주희: 안녕하세요 저는 “Joobo”라고 불리는 심주희입니다. 저는 32살 직장인입니다.   


2. 두 분 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케냐로 이주하셨어요. 케냐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궁금해요.   

1994년, 케냐에서 주희 님과 주희 님 어머니

건희: 케냐는 너무 어릴 때 약 3년 정도만 살았기 때문에 많은 기억은 없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어요. 기린에게 먹이를 줬던 것, 초등학생 때 수영을 배웠던 것, 집에서 일하시던 도우미 아주머니와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대화했던 것, 그리고 동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항구도시인 몸바사에서 직접 게를 잡았던 기억 등이 있습니다.


주희: 저 역시 케냐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아요. 제가 태어나고 백일잔치를 하자마자 케냐로 이주를 했거든요. 케냐에서 어린이집을 다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어린이집 등하원 버스를 “matatu”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이 말하시길 저는 당시 스와힐리어를 현지인처럼 했다고 하는데, 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희 집에서 일했던 도우미 아주머니 피비 (Phoebe), 집, 그리고 이웃 친구들이 아주 살짝 기억납니다.   


3.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께 아프리카는 아직 낯선 곳일 것 같아요. 케냐와 짐바브웨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건희: 케냐는 대중에게 저희가 대체적으로 떠올리는 아프리카 초원, 그리고 동물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도심에서는 절대 동물을 찾을 수 없고 무조건 동물원을 가거나 국립공원을 직접 방문을 해서 동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거주했던 당시 케냐는 정치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시기이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주희: 짐바브웨의 경우 아프리카 남쪽에 위치한 육지에 둘러싸인 국가예요. 대체적으로 짐바브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위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을 하지요. 하지만 짐바브웨는 그 나라 자체 언어, 문화, 그리고 역사를 가진 독자적인 나라입니다. 짐바브웨는 100년 이상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고, 백인만 정치 참여가 가능했으며 (White Minority Rule),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1980년 4월에서야 독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짐바브웨에 대해서 들어보셨다면, “로버트 무가베"와 “100조 달러"에 대한 이야기 역시 들어보셨을 거예요. 짐바브웨는 오랜 기간 지속된 무가베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심각한 물가상승률을 겪으며, 짐바브웨의 화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낮은 화폐로 전락했어요. 저희 가족은 그 기간 내내 짐바브웨에서 살았지요. 그러한 경제, 정치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짐바브웨는 아름다운 기후와 자연, 사람들, 그리고 좋은 교육으로도 유명하답니다.   


4. 저도 짐바브웨를 여행차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멋지다 못해 무서운 빅토리아 폭포와 호텔에서 경험한 비싼 물가, 그리고 호텔 근처를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는 원숭이 등이 기억에 남아요. 거주하는 입장으로서는 어떤 나라였는지 궁금해요.   


건희: 빅토리아 폭포는 비싼 관광지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곳이죠. 게다가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이어주는 다리에서 120미터 번지를 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저는 거기서 번지점프를 세 번했답니다. 


저의 인생의 반을 짐바브웨에서 보냈기 때문에 짐바브웨는 저에게 첫 번 째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학교 생활이 너무 재밌었어요. 저에게는 좋은 친구들과 귀한 추억들을 많이 쌓고 지금의 활기찬 성격을 만들어준 소중한 곳입니다.


짐바브웨는 전기와 물이 엄청 귀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단전과 단수는 빈번한 일이었어서 미리 물을 받아놓은 물탱크에서 바가지로 샤워하거나 씻는 경우들이 많았고요. 비상 탱크에 있는 물이 바닥나면 아버지가 멤버십을 소유하고 있었던 골프장에 가서 샤워를 하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ㅎㅎ 


전기가 없는 날에는 가족끼리 거실에 모여서 촛불 켜고 숙제를 하거나 체스 또는 장기를 두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성인이 되어 한국에서 자취할 때 전기가 나갔던 경우가 있었는데, 한 시간 만에 다시 복구되어서 동생과 함께 엄청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희: 짐바브웨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나날들을 보낸 곳이에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저는 짐바브웨의 수도인 하라레에서 다녔죠. 저는 짐바브웨인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고 그분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 역시 그곳에서 만났어요. 짐바브웨는 지금의 저를 만든 곳이고, 저는 언제나 그곳을 “집"으로 여길 거예요. 


짐바브웨에서 사는 것은 분명 어려운 점도 있어요. 앞서 오빠가 말한 것처럼 전기, 물, 휘발유 등이 종종 부족했죠. 간단히 씻는 것을 위해서도 물을 욕조와 바구니에 모아서 했어야 하니까요. 당시 저희 어머니는 화장실 볼 일을 세 번 이상 본 다음에 변기물을 내리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  


단전은 정말 빈번한 일이었고, 초를 켜고 숙제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죠. 그리고 저희가 (종종) 쓸 수 있는 타당한 핑곗거리도 되었어요. “선생님, 어제 전기가 나가서 숙제를 못했어요"라고 말이죠.ㅎㅎ 


휘발유 역시 종종 동이 났기 때문에 휘발유를 얻기 위한 “휘발유 줄" (Petrol Queue) 역시 몇백 미터 길이로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휘발유를 얻기 위해 거의 매일 두 시간 이상 줄을 서있기도 했어요. 응급상황이 생겨 경찰이나 119를 불러도 “기름이 없어서" 그들이 못 오는 일들도 생기곤 했죠. 


2008년, 제가 현지에서 고2였을 때 경제침체와 물가상승과 더불어 당시의 대통령 선거는 짐바브웨의 새롭고 무서운 바람을 몰고 왔어요. 폭동과 시위등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고, 학교들은 모두 한 달 이상 임시 휴교를 했어요. 저희가 살았던 거주지역 (residential complex)에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고, 저는 집 밖으로 잠시라도 나갈 수가 없었어요. 당시 슈퍼마켓에는 우유, 빵을 비롯하여 기본적인 음식이 동이 나서 아버지를 포함한 한인회 아저씨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운전을 하러 가서 음식을 구해오셨어요. 


아빠는 트럭 가득 빵, 우유, 그리고 다른 음식들을 싣고 돌아오셨고 모두 냉동고로 직행되었어요. 저는 당시 굉장히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에 학교를 갈 수 없단 사실에 매우 화가 나있었고, 동시에 친구들을 보지 못하는 것도 슬펐어요. 


이 모든 것들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의 저에게는 이 것이 제가 알던 “유일한 삶"의 형태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이벤트들도 일상적이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접속이 원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저는 더욱더 밀접하게 놀 수밖에 없었죠. 저희는 종종 아프리카 남부의 문화인 브라이 (바비큐)를 하기 위해 서로를 초대하거나, 물이나 전기가 있는 친구 집에 가서 씻기도 하고 숙제도 함께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이런 환경에서 저희를 키우시기 힘드셨겠다 싶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삶이 제가 알던 유일한 삶이었고 저는 매우 행복하고 순수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어요.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만 야간 개장을 하는 짐바브웨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놀러 갔을 때 잠비아 국경에서 사촌동생들과


5. 짐바브웨에서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모두 보내셨는데, 외국인학교 혹은 현지 학교를 다니 신 건가요? 학생으로서의 경험도 궁금합니다! (현지 언어인 쇼나어를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건희: 저랑 동생은 현지인 학교를 다녔는데요. 중학교 때까지는 학교에 백인들이 많았는데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정부에서 백인들을 국가에서 쫓아내는 사건들이 많았고 그때부터는 학교에서 백인보다는 현지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다녔던 학교는 IGCSE (Cambridge) 커리큘럼을 도입했기 때문에 영국식 프로그램을 따랐습니다. 선배를 존중하고 임원들 말을 들으며, 선생님 말을 잘 듣는 문화나 엄격한 교복 역시 영국식이었죠. 방과 후 활동 역시 의무적이었어서, 당시 저희는 거의 하루 종일 학교에 있었어요. 


재미있게도 저랑 동생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 같은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게다가 고등학교에서 저는 전교 부회장을 맡았고, 동생은 전교 회장을 맡게 되어 당시 저희 학교에서 처음으로 아시안 학생들이 학생 임원들을 맡게 되었어요. 짐바브웨 한인들 사이에서 저희는 엄청난 자랑이었답니다! 


주희: 오빠가 말한 것에 덧붙이자면, 학교가 영국식 시스템을 따르기 때문에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이 되었어요. 4학년, 5학년 때 쇼나어를 배우는 수업이 있었기에 당시 꽤 잘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 후엔 많이 잊었어요. 저는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기에 쇼나는 점점 잊혀져갔죠. 

학교는 당시 저에게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집에서 한국어를 쓰는 것에 있어서 엄격하셨고, 어렸을 때부터 저희는 집에서 한국어만 쓸 수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영어만, 집에서는 한국어만 쓸 수 있었죠. 매일매일 저는 두 가지의 페르소나를 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는 저의 다름으로 인해 한동안 괴롭힘도 당했기에 “한국인 페르소나"를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 후 더 국제적인 경험을 쌓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저를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여주는 로컬 친구들 역시 만났어요. 그 당시 저는 한국 음식과 문화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아마 중학생 때 저는 저의 정체성에 있어 조금의 자신감을 얻게 된 것 같아요. 

친구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하여 열었던 생일파티 (개를 들고 있는 주희 님, 멋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건희 님)
고1 마지막 날, 고2 때부터 새로운 교복을 입게 되어 롤링페이퍼처럼 교복에 낙서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6. 현재 짐바브웨에 남아계신 가족분이나, 연락이 닿는 분이 있으신가요? 현재의 짐바브웨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요.

  

주희: 부모님, 그리고 함께 있었던 친척들은 이제 다 한국에 살고 있어요. 당시 친했던 친구들과 친구들의 가족 역시 많이 짐바브웨를 떠났고, 현재 짐바브웨에 살고 있는 친구 1-2명 정도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요. 제가 짐바브웨를 떠난 이후에는 그렇게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은 2017년 로버트 무가베의 37년 정권의 끝을 내는 쿠데타 바로 직전에 모든 것을 다 팔고 짐바브웨를 떠나기로 결심하셨어요. 저희의 다른 친척분들은 코로나19가 터지고 어렵게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죠. 


현재의 짐바브웨의 물가 상승은 더 심해졌고, 빈곤율 역시 두배로 늘어났으며 사람들은 구직난을 겪고 있어요. 또한 하루에 20시간에 달하는 단전을 겪고 있기도 하죠. 이러한 뉴스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지만, 저는 짐바브웨가 다시 예전처럼 빛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저 역시도 언젠가는 방문하고 싶어요.  


7. 두 분은 자라며 중간에 한국을 오고 가셨나요? (예를 들면 방학 때 등) 성장기에 ‘한국'은 건희 님과 주희 님께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요!   


건희: 한국에 자주 오진 않았지만 짐바브웨에서도 부모님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엄격하게 교육을 시켜주셨어요. 자주 오진 않아도, 와야 할 이유가 있어서 올 때마다 항상 빠르게 변화는 문화를 따라가는 것은 힘들었고 워낙 피부가 까만 편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외국인으로 보는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제일 좋았던 것은 롯데월드 같은 곳을 평일에 갈 수 있었기에 마음껏 편하게 다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또한 음악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사촌들이 테이프 또는 CD들에 한국 음악을 담아서 보내주기도 했었고, 유명한 한국 영화와 드라마들을 DVD로 가져와서  짐바브웨에서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주희: 짐바브웨가 워낙 멀어 자주 오고 가진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를 못해 49재에 참여를 하거나 병원 검진을 위해 오곤 했었어요. 제가 아기 때 한국을 떠난 후 다섯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대학 입시를 위한 시험을 치르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왔었어요. 


저에게 한국은 늘 이상하리만큼 꿈같은 곳이었어요. 제가 첫 번째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본 나라기도 했고, 매서운 추위를 경험한 곳이기도 했죠. 할머니댁 주변에서 적은 용돈으로 군것질도 사 먹고, 비디오테이프나 만화책 역시 빌릴 수 있었어요. 짐바브웨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죠. 


서울에 있는 친척들 집을 방문하고 롯데월드에 간 것은 어린 주희 (Joobo)의 한국에서의 경험 중 최고의 경험이었어요. 제가 가본 곳 중 가장 환상적인 곳이었어요! 


어떤 냄새를 맡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느낌을 아시나요? 저는 한국에서 슬슬 겨울이 올 때 맡게 되는 냄새 중 한 냄새만 맡으면 그렇게 예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할머니 댁에 묵을 때가 기억이 나요. 전 그걸 “한국 냄새"라고 불러요. 확실히 어떤 냄새인지 형용하긴 어려운데, 한국의 겨울은 저에게 후각적으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특별함이 있었어요. 


Part II. 한국에서의 청년기


8. 계속 해외, 그것도 한국과 지리적 & 문화적으로도 아주 먼 곳에서 평생을 사시다 한국으로 대학교를 진학하시기로 한 계기가 궁금해요. 역으로 한국 대학생활 및 전반적인 적응은 어떠셨나요?


건희: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늘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중요성을 잃지 않도록 교육해 주셨어요. 부모님은 성인이 되어 저희가 한국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원하셨고, 저는 군대도 가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대학을 진학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저는 공부를 엄청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하기로 유명한 서강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어요. 사실 1학년 때에는 한국어로 수업을 하고 다른 친구들처럼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학과 친구들과 소통할 때도 공감대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락밴드 동아리를 들어가면서 저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TCK 동기들과 좋은 선배들과 후배들을 만나면서 대학생활에 거의 모든 하루를 공부보다는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온 이후 학업에 더 열중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또한 복학 이후에 또 다양한 TCK들을 만나고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만나는 소중한 대학교 절친들이 생겼습니다. 덧붙이자면 사회에 나와서는  나라 누나와 같은 회사에서 저의 첫 인턴 경험을 하면서 회사에서도 TCK들이 어떻게 회사에 적응하는지 보고 사회생활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주희: 저의 대학 진학과정은 오빠랑 비슷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매우 달랐어요. 저는 한국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에 있어 반대가 심했고, 아마 살면서 부모님과 가장 오랫동안 의견 대치를 했던 기억일 거예요. 저는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없었지만 영국이나 미국에 있는 특정 대학교로 진학을 희망했어요. 당시 저에겐 그게 매우 중요했거든요. 부모님의 반대를 마주하고 한국에 있는 대학교로 결국 진학을 하기로 했고, 제가 하고 싶은 전공을 하기로 했는데 부모님의 반대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어요. 더 긴 대치가 이어졌죠.


대학교 진학 준비를 할 때는 약간의 패배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학은 대학이었어요. 제가 그동안 머물렀던 둥지를 떠나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에 설렜습니다. 대학 시절 첫 두해 동안은 적응을 하는데 조금의 좌충우돌이 있었고,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나답게 사는 것"이었어요. 제가 말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고 왜인지 알 수 없었어요. 다시 초등학교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죠. 저는 “잘못되었고", 이상했고, 달랐어요. 그래서 그때 정체성 혼란을 매우 세게 겪었어요. 저는 케냐인도, 짐바브웨인도, 한국인도 아니었어요.


감사하게도 학부 2학년 때 저는 저처럼 자란 다른 TCK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모두 다른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슷한 것들을 겪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저의 TCK 친구들은 당시의 대학생활과 제 한국에서의 삶 자체를 전반적으로 더 즐겁고 쉬워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 현재까지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 지내고 있어요.


2016년 2월, 대학교 졸업식날

9. 건희 님은 PR을 하시다가 현재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시고, 주희 님은 외국어 및 번역 업무를 하시다가 OTT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업무를 하신다고 알고 있어요. TCK로서의 경험이 커리어적인 선택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건희: 한국에서 TCK로 지내는 것은 언어를 한 가지 더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제게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벌 수 있는 영어 과외 혹은 학원강사라는 선택지가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통번역 일 역시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많았죠.  


저의 첫 직업을 선택하는 데는 TCK로서 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해외 클라이언트 또는 외국인들과 일을 하는 것을 항상 추구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PR 분야로 진입을 했고, 덕분에 저는 해외 클라이언트와 해외 출장이 많은 어카운트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성인이 된 이후로 제 자발적인 선택으로 해외 경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 잘 다니고 있던 PR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떠났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야근 등에 시달렸기 때문에 호주에서는 워라밸을 챙기면서 사는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비싼 물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잡을 뛰게 되었고 주말까지 일하면서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만 했었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느끼면서 좋은 친구들도 만날 수 있는 정말 값진 경험이었어요.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2020년 1월에 만료 예정이었고, 일 년 동안만 호주에서 거주를 한 게 너무 아까워서 당시 학생 비자로 전환을 할까 고민했지만 여러 고민 끝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약 한 달 동안만 더 여행하고 2020년 1월 20일에 다시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코로나가 터졌기에 돌이켜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케이스이었습니다. 게다가 경기 역시 침체되면서 취직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호주에서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갭이어를 가지고 건강 회복에 집중을 해 20킬로를 빼고 첫 바디 프로필까지 성공적으로 찍게 되었습니다. 쉬는 기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나는 아무거나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 이후에 잠시 다른 PR 회사를 거친 후, 해외영업과 무역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무역 관련 스타트업에 좋은 기회가 생겨서 큰 마음을 먹고 합류를 하게 되었어요. 당시 무역에 대해서 일도 몰랐던 저지만 빠른 배움을 통해 1년 반 만에 인도 지사를 설립하는 성장을 보였고 지금은 여러 시장에서 새로운 바이어를 발굴하는 해외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희: 대학 시절에는 확실히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당시 저는 이태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더 높은 비용을 받기도 했죠. 뿐만 아니라 많은 통번역 일을 여기저기서 하기도 했고, 영어학원에서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대학 졸업 후에는 풀타임 정규직으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뭔가 제가 능동적으로 한 선택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수순이었던 것 같아요.


판데믹 기간 동안에는 여러 번역 업무 의뢰가 있었지만 저는 제가 그 업무를 할 만큼의 실력이 되는지 스스로 확신이 없어 거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인생 내내 통번역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저희 부모님을 위해 늘 통번역을 하기도 했고, 짐바브웨 내 한국인 커뮤니티들을 위해서도 많이 일을 했었어요. 한국에서는 여러 학생들과 교수님들의 에세이, 논문, 이력서 등의 번역을 도맡아 하기도 했죠. 그래서 자신을 가지고 해 보자 했는데 운이 좋게도 한 대기업이 저의 번역 업무를 좋게 봐주었고 담당 번역가로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저의 실력에 더욱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 제가 소속한 회사에 자의적인 선택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어요.   


10. 그 외에 두 분 모두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굉장히 락킹(!)한 음악들인 것으로 알고 있어 참 궁금했어요. 두 분이 하는 음악과, 하시게 된 계기를 간단하게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두 분의 성장경험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건희: 음악은 저의 취미생활인데요.


저희 집 원칙은 악기를 한 가지를 무조건 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부터는 둘 다 피아노 레슨을 받았습니다. 저는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피아노가 너무 재미없게 느껴져 그때부터 락과 메탈 음악을 듣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렉 기타 또는 드럼을 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했고 저는 피아노 대신 드럼으로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친한 학교 친구들과 따로 밴드도 만들었었고 나중에 대학 가서도 하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한국 대학에 입하면서 바로 메탈만 전문적으로 하는 동아리에 드럼 파트로 지원을 했고 그때부터 저의 드럼 인생의 2차-3차 성장기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동생이 같은 대학 그리고 같은 밴드까지 가입하게 되면서 제가 군대 전역 후 복학 했을 때 동생의 학번에 드럼이 없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때 제가 동생네 팀을 위해서 드럼을 치면서 동생과 밴드 활동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가끔 다른 선배 및 후배들과 프로젝트 밴드 형식으로 동생과 밴드 활동을 회사를 다니면서도 계속 이어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2019년 이후로 드럼을 치진 않고 있지만 언젠가 또 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여담이지만 동생이 제가 듣던 음악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저희는 아직도 같이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고 있어요. 작년 11월에는 일본 도쿄에 좋아하는 밴드가 나오는 페스티벌을 같이 갔었고, 올해 2월 말에는 SUM41의 마지막 투어 공연을 같이 보러 갈 예정입니다.


주희: 저 역시도 음악을 취미로 하고 있어요. 오빠가 말한 것처럼 다수의 아시안 아이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인 “피아노 레슨"을 저희 역시 배워야 했고 오빠나 저나 정말 싫어했던 기억이 나요!


오빠는 드럼으로 악기를 바꿨고, 당시 저희 아버지는 교회 찬양팀에서 저희가 아주 어릴 적부터 공연을 하게끔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찬양팀 밴드를 리딩하는 기타를 치셨고, 저는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오빠는 드럼을 쳤죠. 매주 토요일마다 찬양팀 연습 시간이 있었는데 덕분에 저와 오빠는 자연스럽게 밴드 합주 등의 경험을 배우게 되었어요. 오빠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밴드도 결성해 저희 집에서 합주를 종종 했는데, 당시 제 눈엔 그게 정말 멋져(cool) 보였어요.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제 취향은 아마 아버지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희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진짜 악기를 칠 줄 아는 사람들 음악이면 다 들어도 된다"식으로 저희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아버지는 테크노 같은 기계음악을 정말 싫어하셨고 “진짜 음악"이 아니라고 하셨죠.ㅎㅎ 그래서 자연스럽게 락이라는 장르에 빠지게 되었지만 사실 오빠와 저는 기계 음악도 좋아해요.


또 전 당시 멋지고 싶었고 (cool) 가스펠 음악을 하지 않는 밴드에 합류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 후 오빠가 몸담고 있던 밴드에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운 좋게 합격을 했어요. 음악활동을 하며 저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공연을 하며, 심지어 오빠랑 같은 무대에 서기까지는 최고의 시간들을 보냈어요. 전 아직도 간간히 친구들과 공연을 하기도 해요. 좀 더 나이가 들면 오빠랑 저는 “아재밴드"를 결정할 예정이에요. 진심입니다!


드럼을 치는 심건희 님
공연 중인 심주희 님

11. 두 분이 같은 대학교로 진학하고, 취미생활 역시 같은 게 저는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먼 타지에서 시간을 보내면 형제자매지간이 더 끈끈해지는 경향이 있긴 한데, 두 분의 사이는 유독 돈독해 보여요. 또 흥미로웠던 게 성인이 되어 두 분 모두 각각 워킹홀리데이라는 선택으로 일본과 호주를 택하셨던 것이었어요. 가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건희: 초, 중, 고, 대, 밴드까지 다 같은 곳을 나왔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는 특별한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겠죠!ㅎㅎ


개인적으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이유 중 가장 큰 것 두 개를 꼽으라면  

     성인으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첫 해외거주경험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해보는 경험, 그리고 워라밸을 찾아보기   

였어요.


워킹홀리데이는 20대에게 주어지는 너무나도 소중한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 때는 학업 및 용돈 벌이 때문에 시간과 돈이 부족해서 생각을 못했지만, 조금 더 일찍 워킹홀리데이를 갔으면 제가 지금은 조금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늦게 다녀온 것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않고 다녀온 것 자체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워킹홀리데이를 고민하고 있는 TCK가 있다면 무조건 가는 것을 추천해요. 부모님의 선택으로 우리가 어릴 때 경험한 것, 혹은 대학시절에 다른 국가를 경험한 것과는 또 다른 큰 차이가 있고 스스로 한 모든 선택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주희: 저와 오빠는 어릴 때부터 매우 가까웠어요. 저희 부모님은 짐바브웨에 거주하실 때 유학생들을 위해 늘 홈스테이를 호스팅 하셨는데요. 저희 어머니는 저희 집에 머무는 유학생들에게 많이 집중을 했어야 했기 때문에 전 오빠에게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 남매들이 사춘기를 겪으며 멀어지기도 하는데, 저희는 더 가까워졌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여학생들만 다니는 여중, 여고를 나오기 원하셨었는데 저는 오빠가 다니는 남녀공학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계속 부탁했어요. 오빠는 항상 저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오빠랑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은 참 즐거웠죠. 서로의 친구를 소개해서 큰 그룹으로 놀기도 했고, 사실 아직까지도 그래요. 그래서 제 친구가 오빠의 친구고 오빠의 친구가 제 친구죠.


저는 늘 자란 환경과 아예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제가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했을 때 저는 영어를 가르친 지 5년이 되어가는 제 삶이 지루하다 느껴졌고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문제도 겪고 있었기에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많은 젊은이들이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로 가보고 싶었어요. 저는 늘 일본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이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기엔 나이가 많아 학생 비자를 신청했어요.


비자 신청 후 퇴사를 하고, 짐을 싸고, 할 줄 아는 유일한 일본어가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뿐임에도 일본으로 떠났어요. 일본에서는 일본어학당을 다녔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놀며 일본을 탐험했어요. 언어를 배운 후 취직을 하기 바랐지만 코로나19가 터져서 어학당은 휴교했고 저는 락다운을 경험한 후 잠시 한국에 왔는데, 그때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며 국경이 폐쇄되었어요.


당시 저는 해외에 살고 싶은 제 마음을 온 우주가 반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일본에서 거주했던 시간은 짧지만 그때의 경험이 참 감사하고,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요. 최근에 오빠와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일본 어학당에서 배웠던 기초 일본어가 꽤 유용하게 쓰였답니다!


12. 건희 님과 주희 님이 생각하시기에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건희: TCK로 자란 장점은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에요.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대해 엄청 오픈되어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요. 반면 아쉬운 점은 좀 더 다양한 국가를 경험해보지 못한 점이요!


주희: 저뿐만 아니라 많은 TCK들이 언어적, 문화적 혜택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전 세계에 친구들이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럼에도 하나만 고르라면 저는 “공감능력"인 것 같아요.


TCK로서의 삶은 저에게 더 깊이 그리고 많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어요. TCK로 자랐기에 양쪽의 입장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격차를 줄이는데 기여를 할 수도 있지요. 이러한 면은 살면서 마주하게 된 여러 방면에서 적용을 할 수 있었어요. 어떤 문제든 다양한 각도로 조명을 할 수 있었죠.



반면 아쉬운 점은 연애가 아닐까 싶어요. 운이 좋게도 저의 배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을 만났지만, 저는 가끔 제가 그들 옆에서 100% 온전한 저로 존재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어요. 한국인이 아닌 사람과 함께 할 때는 저의 한국인적인 면을 완전히 보여주기 어렵고, 반대의 입장도 마찬가지예요.

아직까진 저와 같은 TCK와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만나면 혹시 다를까 싶기도 해요. 아마 TCK가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한 것이겠지요!


13. 점점 다양한 삶이 생겨나고, 이동과 교류가 많아짐에 따라 저희 같은 TCK들은 더더욱 많아질 것 같아요. 이렇게 자란 TCK가 현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또한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건희: 2020년 World Migration Report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3.6%만 국제이주민이라고 해요.


우리가 해외를 경험하는 방식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지만, 수치만 봤을 경우 국제이주민의 수치는 아주 높지는 않아요.


물론 본래의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다양한 문화권에서 자란 TCK들은 여러 국가의 문화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로서 국가 간에 소통, 문화교류 그리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 국제기관에서 일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일을 하든 각자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할 수 있기에 귀한 인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는 최대한 많이 경험하라고 싶어요. 정체성의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나라, 동네, 사람, 문화 등을 다 경험해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랑 잘 맞는다” 이런 고정적인 마인드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외국어는 다 나중에 피와 살이 되기 때문에 미리 공부해 놓으면 당연히 더 좋습니다


주희: 저와 오빠가 해외에서 살았을 때와 지금의 세계는 또 달라요. 지금은 인터넷이 빠르고 원활하기에 다양한 문화와 언어들이 서로 쉽게 교류가 되지요.


다양한 형태의 K-콘텐츠들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현재 청소년기를 겪고 있는 TCK분들이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고, 반대로 해외 문화를 한국에 들여오는 부분에 있어서도 같을 것이라 생각해요.


각자의 다른 점, 유니크함을 사랑하고 그러한 다른 점 때문에 혹여나 괴롭히는 사람이 있더라고 무시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겪은 것처럼 인생이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을 절대 모를 것이기 때문이에요! 


14. 건희 님과 주희 님 본인에게 TCK란 어떤 의미인가요?   


건희: 솔직히 이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는 TCK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부모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추후 아이가 생긴다면 꼭 해외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생각이 큽니다. 아버지가 항상 저희에게 해줬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세계는 엄청 크고 넓다, 꼭 한 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 없고 어딜 가든 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Third Culture Kid는 부모님들이 고생해서 우리에게 주는 인생에 한번뿐인 귀한 선물이고 경험이란 생각이 듭니다.


주희: 저 역시도 이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TCK로서의 삶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늘 다른 나라와 환경에서 자란 것을 행운으로 여겼고, 아마 TCK의 의미 역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TCK로서의 삶은 제게 “축복"이에요. 저는 언어조차 알지 못하는 생소한 국가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일궈내고 저희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너무 존경스럽고, 미래의 제 아이에게도 이러한 축복을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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