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 네덜란드에서 자란 후 한국에서 거주 중인 김태진 님
어릴 적 지도에서 '수리남'이라는 나라 이름을 보았을 때 나라 이름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어떤 언어를 쓰는지, 실제 어떤 모습인지는 하나도 알지 못한 채 한참이 지나 그 나라 이름을 다시 만난 것은 넷플릭스에서였다. 개인적으로 범죄, 액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지라 그 시리즈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보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나라를 미디어에서 특정 모습으로 그렸을 때 생기는 오해나 편견 등이 혼자 조금 우려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셜미디어에서 어느 분의 닉네임인 '수리남코리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분의 소셜미디어에 들어가 그가 자란 이야기를 읽으니 수리남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궁금해지는 동시에 그분의 낙천적인 태도와 강한 정신력의 비결이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의 궁금증으로 연락을 취해 인터뷰의 연을 맺게 된 수리남코리안, 태진님은 머나먼 미지의 나라 수리남에서 자란 것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 혼자 다른 대륙으로 조기유학을, 그것도 금전적으로 독립하여 간 경험이 있다. 그의 다채로운 성장환경만큼이나 직업적으로도 다양한 경험이 많았고, 그 변화 속에서 TCK 정체성이 확실한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한다.
태진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TCK들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환경의 변화 (대부분 부모님의 일이나, 선택으로 인한)를 겪으며 어려움도 경험하지만, 결국 그 속에서 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 결정하는 것은 다 각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진님의 낙천적이고 외향적인 기질이 참 멋진 자산이고,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늘 본인의 스토리를 멋지고 푸르게 엮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1. 안녕하세요, 본인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수리남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자란 김태진입니다.
선교사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만 9세 때 수리남으로 선교이민을 갔었고요. 현지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때 네덜란드에서 유학생활을 했었어요. 대학교는 한국에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외항사 승무원, 대사관 직원, 여행사 인솔자, 네트워크마케팅회사 해외사업부 직원으로 근무했습니다.
2. 수리남은 한국 사람들에게 상당히 생경한 곳인데 어떤 곳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수리남이 넷플릭스 시리즈 덕분에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넷플릭스에 나오기 전까지는 만났던 사람들 중 99%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수리남은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인 곳이에요.
지리적으로는 남미에 속한 국가이고 북쪽으로는 카리브해, 좌우에는 가이아나, 프랑스령 기아나가 있고, 남쪽으로는 모두가 아시는 브라질과 국경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다르게 네덜란드어가 공용어이고요, 네덜란드식 교육 방식을 따르고 있어서 대부분의 국민들이 네덜란드어, 영어, 수리남어에 능통합니다.
인구구성도 히스패닉은 거의 없고 아프리카계 흑인, 인도인, 인도네시아인이 전체 인구 50만 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요. 중국인, 네덜란드인들과 이 모든 인종들 사에서 태어난 혼혈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어 역시도 기독교, 가톨릭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서로 큰 분쟁 없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기후적으로는 일 년 내내 20도에서 35도 사이의 열대성 기후라서 항상 덥고, 건기와 우기로 나뉘어 있어서 우기 때는 비가 일주일 내내 오기도 합니다.
수리남은 전 세계에서 탄소 배출이 마이너스인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일 정도로 열대우림이 국토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물 좋고 공기 좋고 날씨 좋은 나라예요. 제가 기억하는 한 천재지변이 없는 나라이기도합니다.
다른 남미 국가와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조화와 평화인 것 같아요.
여러 인종, 여러 문화, 종교 등이 잘 어우러져서 서로의 국경일도 축하해 주고, 다양한 음식도 스스럼없이 먹으면서 잘 어우러져 지내요. 남미 문화도 있고, 카리브해 문화도, 유럽 문화도 그 안에 섞여 있어서 인구는 적지만 이상적인 다문화 국가 같아요.
3. 수리남 현지에서의 학창생활이 궁금한데요. 어떠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처음에 이주했을 때는 저희 삼 남매가 국제학교를 다녔고 거기선 영어로만 수업을 했었어요.
부모님이 저희 모두를 국제학교를 보내기에는 학비 감당이 안되셔서 1년 후에 현지 초등학교로 옮겼는데, 이제 겨우 영어로 뭔가 들리기 시작하던 때에 네덜란드어를 알파벳부터 배워야 했으니 너무 어려웠어요. 그리고 언어적인 이유로 원래 나이에 따라 학급 배정이 안돼서 원래라면 6학년이었어야 했는데 3학년부터 시작했어야 했죠.
수리남은 모든 학교가 오후 1시에 끝나요. 대학교도 마찬가지고요. 이유는 그 이후 시간은 너무 더운데 학교에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학교에 없어서랍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들은 벽 쪽에 벽이나 창문이 없이 쇠창살로만 가로막을 치고 뻥 뚫려 있어요. 그래서 우기 때 비가 많이 들이치면 자리를 창 반대쪽으로 옮겨서 수업을 들었어요.
수리남은 네덜란드식 교육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에 의무교육인 고등학교까지는 거의 무료로 학교를 다닐 수 있고 그래서인지 문맹률도 매우 낮아요.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해도 네덜란드어, 영어,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지요.
중학교 때는 사립학교를 다니게 돼서 위에 언급한 언어 외에도 불어, 독일어까지 배웠던 와중 집에서 무조건 한국어를 해야 했기에 동시에 6개 언어 공부하느라 좀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현지 학교의 수업 난이도는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하고 (대화가 많은 수업이었어요), 숙제를 잘하고 복습을 좀 하면 어느 정도 상위권이 유지가 되었어요. 제 생각에 한국인들은 대체로 어디서든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방과 후에는 대부분 집에서 숙제를 하고 좀 쉬다가 친구들을 만나서 놀거나, 운동하거나 그러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그런 생활이 다였어요. 과외나 학원 같은 건 한국인 빼면 거의 안 하고요. 저희 집도 가난해서 과외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또 수리남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매년 성교육을 제대로 시켜요. 한국에서의 성교육과는 많이 다르죠. 예를 들면 콘돔을 실제로 바나나나 오이 같은 거에 껴보는 연습을 해요. 90년대 초에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애들은 연애를 시작하거나 키스를 하는 아이들도 종종 보였고, 중학생 때부터는 성경험을 한 아이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더 일찍 철저하게 교육시킨 것 같아요. 수리남 현지사회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못하게 막는 것보다는 제대로 인지해서 잘 대처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거였어요.
그 외에 저희 집은 선교사가정이다 보니 모든 교회 행사에 다 참여해야 했어요. 집에서 매일 가정예배도 드렸고, 1년에 한 번 성경 정독도 해야 했고요. 한국인과 원주민을 다 섬기는 교회였기 때문에 도와야 할 일들이 매우 많았어요.
여담이지만 해외생활에서 종종 겪는 인종차별의 경우 다행히도 학교나 친구들로부터는 잘 안 겪었어요. 하지만 학교 밖에서 길을 가다가 불특정인에게는 매우 자주 당하는 편이었어요. 가끔은 상대방이 위협적인 행동으로 다가오기도 했는데 그냥 피하면 되었어요. 맞서 싸워본 적도 있지만 흑인들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른 나이에 깨닫고 조용히 피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어요.
4. 청소년기인 10대의 대부분을 수리남 거주 후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국가로 대학교 진학을 할 수도 있으셨을 텐데, 한국으로 대학 진학을 결심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수리남에는 대학교가 한 개밖에 없어요.
거길 졸업하면 사실 수리남에 뼈를 묻어야 하는데… 제게는 고향으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지에서 꽤 잘 사는 집이나 한국인들처럼 이민을 한 다른 국가 사람들은 대체로 네덜란드로 대학교 유학을 많이 가요. 아니면 미국이나 저처럼 한국으로 오기도 하고요.
저도 고등학교 때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면서 네덜란드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고 실제로 입학해서 다니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어요. 원해서라기 보단 어쩔 수 없이 왔었던 경우예요.
5. 한국으로 돌아오셔서는 적응하는데 어려움이나, 문화 차이 등을 겪으셨나요?
저는 한국어도 잘하는 편이었고, 한국> 수리남> 네덜란드> 한국으로 이주를 하며 새로운 곳에 금방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잘 갖췄던 것 같아요. 원래 성격도 긍정적이고 남에게 잘 다가가는 편이라 금세 친구도 잘 사귀고 일도 구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네덜란드에 거주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제가 아르바이트로 직접 돈을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는데 한국 대학교 학비가 너무 비싸서 아르바이트를 혹독하게 해야 했던 것 빼면 크게 어려움은 없었어요.
문화적으로는 수리남, 네덜란드 문화가 저한테 큰 부분을 차지해서 한국과 다름을 지금도 많이 느껴요. 한국 문화를 모르는 건 아니라서 적응은 하고 살지만 100% 한국 사람 같다는 느낌은 안 들어요
6. 항공사 승무원-대사관 직원-여행업 종사자-그리고 마케팅 회사를 거치셨어요. 다양한 산업군과 직무를 넘나드는 데 있어 TCK로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나요?
많은 것 같아요.
우선적으로 다양한 직업군을 거쳤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글로벌'하다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거든요.
제 동생들은 저와 또 조금 다른 것을 보면 모두에게 일관적이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제가 타고난 부분과 경험한 것들이 가능하면 많은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을 상대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줬던 것 같고 또 그러한 상황에서 금방 적응해서 잘 일하는 편이기도 해요.
예를 들면 한국분들이 인도나 아프리카에 가면 힘들어하시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곳을 가도 너무 편하고 좋아요. 아직까지는 해외에 가서 힘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수리남에서 정글의 법칙 못지않게 오지 경험을 많이 한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여담이지만 수리남 정글 안의 광산에서 캠핑도 하고, 광물도 캐보았답니다.
7. 현재 수리남에 남아계신 분이 있는지, 현재의 수리남 모습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제가 있을 당시에는 수리남에 어업전진기지가 있어서 한국분들이 몇백 명씩 있었는데 그 산업이 망해서 지금은 제가 아는 분들은 몇 가구 안 남아 있어요. 한국식당 하시는 분, 수출업 하시는 가족 정도인 것 같네요.
대신 현지인 친구들 대다수는 수리남 아니면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어서 페이스북 통해서 그들의 근황을 종종 보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2015년에 수리남으로 휴가를 다녀왔었고요. 예전 모습에 비해서 약간 발전했는데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경제가 더 안 좋아져서 어릴 때 보다 조금 치안이 안 좋아졌다 하더라고요.
제가 어릴 때는 집에 문을 열어 놓고 살 정도로 안전했기에 어느 나라나 그렇듯 약간의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이에 중국자본과 중국인 유입이 많이 된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매 거리마다 중국인들 슈퍼마켓이 있더라고요
8. 지리적 & 문화적으로도 먼 곳에서 자라신 후 성인이 되고 현재 한국에 자리를 잡게 되셨어요. 2017년부터 쭉 한국에 살고 계신데, 적응하시며 스스로가 겪었던 변화나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실까요?
2017년 1월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요.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한국에 귀국해서 한국 친구들과 네덜란드와 수리남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고 그쪽 관련 일들을 (통번역) 하면서 제가 살았던 곳들의 장단점 이라던가 제가 얼마나 좋고 색다른 경험들을 하면서 자랐는지 깨닫게 된 부분들이 많아요.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각 나라의 좋은 점은 취하고 안 좋은 점은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게 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한국은 밥을 먹을 때 소리를 내서 먹고, 트림도 하고 그러잖아요. 반면 외국에서는 그러면 안 되고 대신 코는 풀어도 되고요. 저는 모든 나라의 에티켓은 다 지키려고 해요. 여러 곳에서 체득한 문화와 에티켓 덕분에 좋은 점이 많아요.
9. 태진님이 생각하시기에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TCK로서의 장점은 어릴 때부터 세상이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동시에 거기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가지게 되었던 점 같아요. 여러 문화를 겪을수록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더 생기니까 그다음 변화를 위한 효율성도 올라가는 것 같고요.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개인적으로는 어디든 집 같지만 동시에 그 어디도 집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여기가 내 고향, 내 집 같다는 느낌은 아직은 좀 부족해요.
저는 네덜란드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같은 북유럽의 선진국에 가서 살고 싶은 꿈을 항상 간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바하마, 포르투갈, 몰디브 같은 데서 소소하게 일하면서 예쁜 바다를 보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양가적인 감정이긴 한데, 이게 심해질 경우 정체성 혼란도 있을 수 있겠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 외에는 저희 집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열심히 사역을 했기에 주재원처럼 조금 더 여유 있게 자랐으면 다른 형태로 경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긴 하지만, 저의 그런 환경 덕분에 더 강하게 잘 자란 부분도 있어서… 뭐가 더 좋다고는 모르겠네요!
10. 점점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지역 간 이동과 교류가 쉬워짐에 따라 저희 같은 TCK는 더더욱 많아질 것이라 생각돼요. 이렇게 자란 TCK가 현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또한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TCK들이 많아지고 국가 간 이동도 자유로운데 그 안에서 또 극우주의도 점점 살아나는 국가들도 많은 것 같아요. 저는 TCK들이 그 안에서 가교 역할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인들도 외국에 가서 인종차별 당하는 것에는 민감하면서 한국 안에서는 동남아인, 흑인, 개발도상국 분들에게 인종차별을 하는 것은 또 잘 모르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TCK들은 조금 더 민감하게 서로의 입장과 차이를 잘 어우러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적인 건 챗GPT가 해결해 줄 수 있어도 문화차이는 직접 겪어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잖아요.
아울러 저는 현지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뿌리를 버리는 TCK들을 많이 봤어요.
물론 그렇게 하면 주류에 빨리 속할 수도 있겠지만, 두 개, 세 개를 잘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그중 하나를 버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뿌리를 잘 유지하고 다른 문화까지 온전히 흡수해서 잘 융화시켜 나갔으면 해요.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동은 더 자유로워지는데 용기와 결단은 오히려 더 못 내리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아마 그만큼 선택권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TCK들은 자신의 꿈을 향해서 과감히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11. 태진님 본인에게 TCK란 어떤 의미인가요?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운전대를 잡고 나아가는데 3개의 백/사이드미러가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여러 각도에서 저를 보고 상대를 보고 주변을 볼 수 있어서 더 안전하게 간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인지 인생을 살아가는 게 (운전을 하는 게) 더 즐거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더 많은 미러를 추가로 장착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