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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 Feb 13. 2020

노브라로 생방송이 가능한 것이었군요?

-노브라 day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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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브래지어를 벗는 것이다.
외출 할 때 잊지 않고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처럼 집에 돌아오면 본능적으로 브래지어를 벗는다.

‘하 후련해’

시원한 기분이 들 때마다 역으로 종일 의식하지 못했던 답답함이 나를 옥죄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안 하니까 이렇게 편한데 말이야. 그럼에도 다음날 아침 외출 할 때 나는 다시 자연스럽게 브래지어로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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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라로 생활하는 하루를 찍어볼까 해요.”

약 두달 전 제작진과의 미팅에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노브라에 대해 평소 관심이 있느냐는 궁금증과 함께 아나운서로서 이 아이템을 선뜻 소화할 수 있겠느냐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나에게 있어 노브라는 자유로움과 해방의 의미였지만 언제나 일정 이상의 선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생각 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집 안에서 혹은 해가 진 후에 반려견과 산책을 할 때 두꺼운 후드티 이상을 입을 때만 허용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방송의 힘을 계기로 하루 통째로 노브라로 생활 해 보는 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즐거운 도전이었다.

“너무 좋아요! 아 그런데..”

하루 종일이라면 방송에서도 노브라를 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생방송에서, 그리고 녹화 방송에서도!
(크 신난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잠시 생각 해 보는데, 제작진도 절대 자극적인 영상을 찍을 생각은 없으니 어느 선에서 망설여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담자 했다. 망설여지는 지점에서, 그 이유에 대해 함께 생각 해 볼 계기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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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노브라 데이’.
샤워를 하고 나와 옷을 입는데 역시나 나도 모르게 브래지어로 손이 뻗는다.
‘허...’
습관이란 이렇게 소름 끼치는 것이다.

집을 나서기 직전엔 ‘혹시 모르니 브래지어를 하나 따로 챙겨가야 하나’를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처음 브래지어를 찬 이후로 단 하루도 빠트려 본 적 없는 필수품이었던 애증의 브라여, 오늘 하루 안녕.

운전을 하면서도 신기했다. 집에 있는 기분이야! 내가 지금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니!


오늘 출근룩은 어제 잠들기 전 나름 고심해서 고른 것이었다. 가벼운 셔츠 위에 짙은 색의 자켓을 걸쳐서 겉으로 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칫 자켓을 풀어 헤치다 보면 셔츠 겉면으로 유.두.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래, 이 유.두.가 어쩌면 노브라의 가장 큰 쟁점 아닐까.

대다수의 여성들이 브래지어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노브라를 지향하지만 망설이는 이유는 유두 노출에 대한 엇갈린 시선 때문일 것이다. 노브라 여성을 봤을 때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대할 사람이 현재로서 많다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전에 단지 익숙하지 않아 어색함을 느끼는 데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결을 달리해 노브라를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이전에 여러 사례를 통해 우리는 목격했다.

'문란하다, 자극적이다, 자기 생각만 한다, 예의가 없다, 꼴보기 싫다.....’

그리고 나는 잠시 뒤 노브라로 생방송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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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오늘아침’. 말 그대로 생방송이다.
내가 노브라로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고 같은 여자 출연자들이 더 반가워 했다.
이전에 전혀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대리만족이 섞여 있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코디팀이 짙은 색 의상을 준비 해 주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겉보기에 브래지어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는 의상이다. 보는 사람에게도 불편함이 없으리라 생각하니 나도 편안함을 느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송에 임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살펴 본 시청자 게시판에도 항의글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방송 해도 되겠는데?’
신선한 경험이자 발견이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 노브라를 하고 방송을 하고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알았다면 또 어느 시청자들은 방송을 하는 내내 나의 가슴에 집중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현장에서도 몇몇 스태프 들에게 “저 지금 노브라 예요.” 라고 말하면 갑자기 표정이 어색해지며 시선을 멀리 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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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탐나는 티비’ 녹화 방송이 있었다.
코디 언니가 이번에는 자주색 원피스를 가져다 주었는데 공단의 두꺼운 소재라 유두가 도드라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왠걸, 입어보니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럴때를 대비해 몇달 전에 사 두기만 하고 한번도 쓰지 않았던 니플 패치를 꺼냈다. 유럽여행 중에 써야지 했는데 그냥 캐리어에 내내 넣어두고 고스란히 도로 가져왔던 것이었다.

‘어랏...’

패치가 효과가 없다. 어떻게 하나 난감해 하는 내게 패널인 김선영 평론가가 가방에서 ‘이걸 써 보라’며 니플패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에 놀라며 나도 모르게 “이걸 갖고 다녀요?” 똥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다.


알고 보니 김선영 평론가는 평소에 노브라가 생활이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작가님들도 우리도 글을 쓰는 직업으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브래지어가 너무 불편해 노브라로 작업한다고 한명 두명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내가 몰랐던 노브라의 세계가 여기 있었다.
동지들이여, 반가웠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김선영 평론가가 준 패치도 효과를 보지 못했고, 나는 급히 다른 자켓을 구해 입고 녹화에 들어갔다. 어쨌든 노브라는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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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모두 마치고 ‘노브라 데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셀프 촬영 스튜디오를 찾았다.
누군가 찍어주는 사진 말고,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촬영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탈의실에서 검정색 벨벳 원피스로 갈아 입는데 유두 부분이 다소 신경 쓰여 흰색 긴 스카프를 둘렀다. 그런데 촬영이 익숙해고 나니 자연스레 스카프를 벗어 버렸다. 몸에 딱 붙는 원피스와 노브라. 그리고 활짝 웃는 내 얼굴. 너무 좋다.


스스로 자유로워지니 남의 시선도 신경쓰이지 않게 되는 것을 느꼈다. 스튜디오 여자 대표님과 남자 작가님이 한공간에 있었지만 나는 노브라를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 좀 보이면 어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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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형 마트에서 장보기를 했다. 이번엔 정말 노브라로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 섞이게 되는 시간이었다.

회색 반소매 옷 위에 후드를 걸치고 카트를 밀고 다니다가, 후드를 벗어보았다. 마주 오는 사람은 내가 노브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차림이었다.

‘왜 떨리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여럿 모여있는 곳은 본능적으로 슬쩍 피해 가고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 있는 건 또 다른 차원이었다.

5분 정도 그렇게 카트를 밀고 다니며 내가 느낀 감정은 일종의 ‘두려움’ 이었다. 나를 비난하지 않을까,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노브라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대가 아직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움츠러 들게 만들었다.
나도 더 당당해 지고 싶다.
그런데 그러기까진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런 순간, 노브라 고수님들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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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루 내가 느낀 감정은 어쨌거나 브래지어는 필수라는 생각이 완전히 깨졌다는 것이다.
그저 생각해 보지 않아서 늘 하던대로, 습관처럼 브래지어에 손을 뻗었던 것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브래지어를 왜 해요?”

‘안 하면 가슴이 쳐진다고 해서요’
‘볼륨감과 모양 때문에요’
‘안 하고 나가는 건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각자의 이유가 있지만 반대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을 이유도 있는 것이다.

‘답답해서요’
‘땀이 차서요’
‘불편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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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라 촬영을 진행하며 남자 제작진들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스튜디오 촬영 날 브래지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고 배치하는 장면을 보며 웃음이 났다.

“원래 이렇게 자연스러웠어요?”
“아뇨 브래지어를 하도 이야기 하고 알고 나니 이제 아무렇지 않게 느껴져요”

남자 PD는 이전에 브래지어에 와이어가 있다는 사실도, 그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답답함을 느낀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이해가 이해를 낳았다.

그러니 혹여 노브라 기사에 성희롱적인 댓글을 다는 남자들이 있다면, 어느 더운 여름날, 꼭 하루는 브래지어를 차고 생활 해 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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