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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을 Jan 23. 2021

고군산군도에서 노을을 만나는 법

군산 고군산군도 구불길을 걸으며

아직은 선선

TV에서 기상캐스터의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겨울인 셈입니다"라고. 외투를 하나 더 입을까 하다가, 아직은 가볍게 나서도 되겠지 싶었다. 걷다 보면 몸에서 열이 오를 것이고, 그럼 차가울 겨울 바닷바람조차 시원하게 느껴질 테니까. 기상캐스터의 예보는 반쯤 적중했다. 고군산군도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아준 것은 작년 겨울에 맞았던, 바로 그 차디찬 공기보다는 '선선하다'라고 말할 정도에 가까운 기온이었다. 다행이었다. 춥다고 여길 정도는 아니어서. 도리어 몸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상쾌했다.

고군산군도는 한적했다. 비수기인 탓이다. 게다가 평일이기까지 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덕분에 소소하고 한적한 어촌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행객이 몰릴 시기에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저 멀리 고기잡이배가 통통 나아가는 모습, 주민들이 한데 모여 그물을 손질하는 모습, 누군가 줄에 걸어 말리고 있는 생선을 고양이가 노리는 모습 등등. 모든 게 멈춰버린 것만 같은 시절이어도, 섬마을의 일상은 본래의 속도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순전히 노을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왔다. 고군산군도의 노을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군산군도를 포함, 서해와 남해의 몇 군데를 묶어 우리나라 4대 노을 명소라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유명한 노을 명소다. 노을빛 풍경을 좋아하는 내게도 이곳은 '애써' 찾는 장소 중 하나다. 출장길이거나 혹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굳이 돌고 돌아 이곳까지 향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 마침 하늘이 예쁘기도 했다. 

바다 멀리에서 날아온 바람이 짠 내를 쑥 밀고 들어왔다. 그래, 이게 섬이지. 고군산군도가 새만금방조제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었다 해도, 섬은 섬이었다. 섬 특유의 공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선유도와 무녀도를 연결하는 선유대교 옆 옛 다리를 따라 건넜다. 선유대교가 생기기 전에 사람들은 이 다리를 통해 오고 갔단다. 사람만 겨우 지날 수 있는 다리 옆으로는 고군산군도의 절경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만한 풍경이 있었다. 


바다가 내어준 길

무녀도의 작은 어촌을 지나고 있는데, 언덕 위로 이어져야 할 길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바다가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썰물이었다. 그냥 가려다가 왠지 모르게 겁이 났는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을 주민들을 본 기억이 났거든.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할머니께 여쭈었다. "여기에서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도 반대쪽 길로 넘어갈 수 있나요?" 그러자 반갑게 웃으며 대답해주시는 할머니, "그럼, 넘어갈 수 있지. 돌부리가 많고, 펄도 있어서 미끄러울 수 있어. 조심히 넘어가요." 마을에서 꽤 오래 살아오셨을 할머니께 확답을 받았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 있게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할머니의 말씀대로였다. 바다가 길을 내주고 있었다. 물이 빠진 곳으로 드러난, 해안 절벽 아래로 난 길이었다. 밀물 땐 바닷물로 꽉 들어찬 공간일 터이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절묘했다. 이게 뭐라고 감동을 해서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사실 이 바위에는 '엄바위'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었다. 파도가 절벽을 깎아 오목하게 만든 형상이 마치 엄마의 품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더 오목하게 패인 것은 이 일대의 지형이 주상절리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서였다. 바위틈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가며, 더욱더 쉽게 풍화 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묘하고도 포근한 품에 잠시 쉬어가는 이들이 적지만은 않았겠지. 

제방 옆으로 펼쳐진 갈대밭은 내내 바다 쪽으로 틀어져 있던 고개를 되돌려 두기에 충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자글거리는 소리, 빛을 받아 반짝이는 군무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사방이 이런 풍경인데 발이 쉽게 떨어질 리가 없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있었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다시 바다

언덕을 넘었다. 무녀도의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언덕길의 꼭대기에서 다시 바다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마을. 마을도, 길도 해안선과 함께 굽이굽이 뻗어 나갔다. 바다 건너 이름 모를 섬들, 파도의 리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어선들로 시선을 옮겼다. 잔잔하고도 광활한 바다는 그 존재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반환점이다. 무녀도 끝자락에 솟은 섬, 쥐똥섬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썰물 때에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귀한 곳이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똥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지명에 '똥'을 넣을 순 없다며 '덕섬'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는 경기도 시흥의 작은 섬이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덕섬과는 다르게 당당히 쥐똥이라 쓰는 그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쥐똥섬이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섬 크기가 쥐똥만하다는 거다. 무녀도에 사는 쥐는 도대체 얼마나 큰 똥을 싸는 걸까. 그 과장 섞인 재치에 관해 생각하다가 그만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쥐똥섬 앞에서 이국적인 카페를 하나 만났다. 미국의 스쿨버스를 가지고 와 바닷가에 세워둔 채 내부 공간을 활용하는 카페였다.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과는 이질적인 분위기였지만, 나름대로 신선했다. 마침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방파제 위에 앉아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이 독특한 카페가 시선을 사로잡았던 셈이다. 수제버거 세트를 하나 주문해서는 스쿨버스 안에 마련된 바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몽실몽실한 구름 떼가 흐르고 있었다. 




내년엔 잘 될 거야, 아마두

돌아가는 길. 이 길을 걷다 보면 노을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물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떠밀려 들어온 파도는 방조제 아래로 파고들어 철썩였다. 동쪽 하늘엔 반달이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냈고, 서쪽으로는 해가 기울어가는 중이었다. 갈대는 아까보다 더욱더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내림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길은 다시 갈대숲 사잇길로, 선유도의 남서쪽 해안가로 향했다. 갑자기 서쪽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게 영 좋지 않은 모양새였다. '나한테 왜 그래?' 속으로 읊조렸다. 노을을 만나러 이곳까지 왔는데. 노을 하나를 보겠다는 그 작은 소망 하나뿐이었거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유봉 꼭대기까지 올랐지만, 구름은 순식간에 머리 위 하늘을 덮어버렸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내게 고군산군도의 절경은 어찌나 아름답게 다가왔던지. 야속하게도.

돌이켜 보니, 딱 일 년 전쯤 새해맞이 소망을 떠올렸던 것 같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유난히 풀리지 않는 게 많았던 작년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유명 래퍼들이 한데 모여 불렀던 노래도 내게 '내년엔 잘 될 거야, 아마두'라며 다독이는 듯했다. 

2020년, 시작은 좋았으나 결코 쉬웠던 한 해는 아니었다. 그래도 꽤 잘 버텨내지 않았던가. 예쁜 노을을 만날 수 없었으면 또 어떤가. 다음에 시간을 한 번 더 내면 될 일이었다. 괜찮다. 결국은 다 잘 풀릴 테니까. 


걷는 내내 잠시 넣어두었던 이어폰을 꺼내 다시 귀에 꽂았다. 그리고는 그때 그 노래를 재생했다. 내년엔 잘 될 거야, 아마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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