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괜찮다. 새로 산 옷이 마음에 든다. 집 앞에 괜찮은 카페를 발견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여름이다. 크로스핏을 등록하고 열심히 운동하기 시작했다. 아무 때나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도 있다. 새로 구한 일에 스트레스 받는 요소가 없다. 오후에 출근해서 아침 시간을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많다. 최근에 읽은 책이 아주 흥미로웠다. 괜찮은 영화와 괜찮은 전시를 봤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매일 예쁜 짓을 한다. 나를 아껴주는 친구들이 많다.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 사는 게 괜찮다. 일단 지금은.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나란 인간은 왜 또 불안해 하는가. 나는 내 감정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안다. 지금 이 둥둥 떠다니는 좋은 기분은 다가올 장마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내릴 것이다. 아침에 들뜬 기분으로 활발하게 온갖 활동을 해내다가도 어두운 밤 잠이 안 오면 유년 시절 기억까지 끄집어내서 우울을 온 몸에 감싼 채 엉엉 울어버리는 사람이 나다. 이렇게 시시각각 널을 뛰는 감정을 안고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는 나의 괜찮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 괜찮네!라고 확신하면 꼭 작은 변수 하나에 추락하곤 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들뜨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게 감정의 낙차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정에 이르렀는가. 개뿔. 나의 수많은 문제점 중 하나로 행복은 의심하면서 불행은 확신하는 버릇이 있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상황에 놓여도 불안해하면서 아주 작은 부정적인 시그널 하나에는 벌벌 떨며 비관해버린다. 불행을 확신하는 걸 넘어 거의 불행해지고 싶어 고사 지내는 수준으로 사실을 왜곡한다. 어제 나는 일을 하다가 다른 동료가 나의 작업물을 수정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내 작업물이 최악이라서 상사가 다른 동료에게 수정 명령을 내렸구나 확신하고 자책하다가 이런 거에 기죽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알고 보니 상사가 동료에게 내린 명령은 나의 작업물에 로고 하나를 더하는 것이었고, 내 작업물은 달라진 게 없었다. 내 작업물을 비난한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내가 행복을 의심하는 이유는 안 좋은 일이 닥칠 거라며 주변 상황을 걱정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부정적이고 나약한지 알기 때문에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분명 난 사는 게 괜찮은데, 내가 형성한 이 삶에 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그래도 나는 사는 게 버겁다. 물을 마시는 것도 버겁고, 밥을 챙겨 먹는 것도 버겁고, 집안일을 미루지 않는 것도 버겁다. 그냥 내 천성이 게으른 거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는데 문득 이런 깨달음이 스쳤다. 나는 일상이 자연스럽지 않구나. 삶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구나.
사는 게 괜찮아도 삶이 버거울 수 있다. 행복해도 죽음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 며칠 전 친구들과 하루종일 재밌게 놀다가 어쩌다 본 영상 하나에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 새벽 네 시까지 엉엉 울었다. 그러고 몇 시간 뒤 숨가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부랴부랴 정신을 일깨우면서 사무치게 우울했던 몇 시간 전의 내가 타인인 것처럼 낯설었다. 그리고는 배고파서 예민해졌다가 급하게 먹은 빵 하나에 다시 평온해졌다. 괜찮다는 게 평화롭다는 의미라면 내 삶은 평생 괜찮을 수 없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내 삶은 클라이맥스를 향한 복선으로만 가득하다.
'괜찮음'에 대한 나의 고찰은 반 년째 이어오는 '심리 상담을 예약해야 할까 말까'라는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고, 옛날 어두운 기억을 자주 떠올리는 내가 자꾸 지금의 내 상태를 '~에 대한 방어기제', '~에 대한 트라우마' 등으로 자의적인 정의를 내리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문가에 의해 진단되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내 상태가 반박의 여지 없이 고정될 것만 같았다.
상담받아야겠다고 확신하면 거짓말처럼 사는 게 괜찮았다. 괜찮은 하루하루를 보내면 거짓말처럼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찾아왔다. 그러다 가슴에 깊이 박히는 한 문장을 만났다.
정상적인 감정을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 우울증을 심도 깊게 분석한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어지간히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의 대부분 내용이 공감됐다. '나 정도면 괜찮지'라고 넘기기엔 내 마음을 두드리는 아픔이 너무 많았다. 사실 난 괜찮은 적이 없었다. 습관처럼 떠올리는 자살 사고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그런데 나는 이런 내가 마냥 싫지 않다. 나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정상'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심리 상담을 망설이는 이유였다.
사회적인 정상성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한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제 우연히 본 동료의 모니터 화면 하나에 비관의 드라마를 펼친 것처럼 나의 어둠도 진정한 본질 같은 게 아니라 내 불안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의 심각한 불안감도 과거 트라우마가 주입했거나 뇌 어딘가가 고장나서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나는 웃다가 우는 내가, 슬퍼하다가 예쁜 풍경에 감탄하는 내가 싫지 않다. 지금의 내가 괜찮든 괜찮지 않든 말이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까? 사실 쓰려고 한 글은 따로 있었는데 오랜만에 쓰는 글이니만큼 계획된 글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을 브런치라는 이 친근한 공간에 털어놓고 싶었다.
아. 결국 내 끝은 글이구나. 글 쓰는 삶을 택한 것부터 난 이미 내 모든 걸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나는 나를 혐오하는 나를 생각보다 사랑하고 있었구나. 내 글은 결국 나를 향한 러브레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