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정 Jan 12. 2023

대답 없는 외침이 주는 것

개에게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훈련학적으로 안 좋다고 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보통 불안할 때나 상대를 경계할 때, 불만이 있을 때 소리를 낸다. 왈왈. 아르르. 낑낑, 하고. 그러니 사람이 자기 앞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를 자꾸 쏼라쏼라한다면 개의 입장에서는 이 양반이 어디가 불한가, 싶을 것이다.


나는 달콩이를 입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책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는 반려동물에게 제발 말 좀 많이 하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아차차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콩이에게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사실 나는 말이 없는 편이다. 직장에 출근해서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따분할 때마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려고 하지만, 나는 온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입이 근지럽지 않다. 점심밥도 거의 자리에서 혼자 먹는다. 가끔은 '나 사회생활 정말 못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렴 어떤가. 말은 많이 안 해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말을 많이 안 해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나에게도 외향적인 시절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외향적인 모습으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길다. 목소리가 큰 편이라 무슨 말을 하면 티가 팍팍 났고, 어딜 가나 떠들썩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로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내가 불필요한 대화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체력과 정신력을 많이 소모한다는 것, 가식적인 대답이나 형식적인 대화를 더 이상 못 견딘다는 것. 게다가 나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입을 열었다가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후회하는 일도, 매번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는 일도 그저 피곤해졌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생각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그런데 여기, 내가 어떤 말실수를 하든 입에서 방귀를 내뿜든 간에 개의치 않는 친구가 생겼다. 바로 달콩이다. 그래서일까. 난 달콩이 앞에서만큼은 수다쟁이가 된다. 말을 많이 할수록 오히려 복잡한 마음이 풀려버리고 잡다한 생각은 사라지는. 보통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달콩이와의 세상.


퇴근하고 집으로 간다. 쉬고 있던 달콩이가 나에게로 잽싸게 달려온다. 어디 갔다가 이제사 오냐고 낑낑거리고 얼굴을 핥는다. 두 팔을 벌리고 앉아있는 나를 뒤로 발라당 넘어뜨린다. 격한 환영식이 끝나고 나면 달콩이는 이내 얌전해진다. 그때부터 대답 없는 나의 질문은 시작된다. 끝은 꼭 "쪄?"로 끝난다.


"달콩이 엄마아빠 없는 동안 잘 쉬었쪄? 어어~ 달콩이 심심해쪄? 오랫동안 혼자 있어서 화가 났쪄~? 엄마는 우리 달콩이 보고 싶어서 혼났쪄~" (듣기 거북하므로 앞으로는 '쪄'를 '어'로 순화하겠다.) 달콩이는 말이 없다.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거나, 장난감을 물고 올뿐이다. 속으로는 '또 시작이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할 때 남의 눈치를 열심히 살피는 나도 달콩이에게 말할 땐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간혹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개들이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개들도 있다. 하지만 달콩이는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다. 의사 표현이라곤 가끔 놀아달라고 소심하게 낑낑거리는 게 전부다. 또 '맘마'라는 말은 알아듣지만 '밥'이나 '냠냠'이라는 말은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딱 훈련받은 단어만 알아듣는 셈이다. 그래서 비슷한 말을 자주 던져도 달콩이는 별 반응이 없다.


달콩아. 산책 갈까? 얼른 쉬야하러 나가자. 온종일 참느라 힘들었지? 아이구. 배가 아주 그냥 빵빵하네. 이리 와. 밖에 추우니까 옷도 입을까? 싫어? 에이, 그래도 입자. 아이고 우리 달콩이 착하다. 현관까지 알아서 왔어? 우리 똥강아지 왜 이렇게 예뻐, 응?


대답도 없는 달콩이에게 무수한 문장들을 쏟아낸다. 이 많은 말들 중에 달콩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산책'과 '이리 와' 정도일 것이다. 산책을 나가서는 더 가관이다.


달콩아. 우리 어느 쪽으로 갈까? 아~ 오늘은 이쪽으로 가고 싶어? 그래. 달콩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달콩이 산책 나오니까 좋아? 좋지? 엄마도 좋아. 달콩이 쉬야했어? 아이 예뻐라(궁둥이를 통통 때려준다). 아니, 냄새 맡겠다고 꼭 그 위에까지 올라가야 돼? 이 엉뚱한 강아지야. 내려올 때 조심! 달콩아, 나온 김에 끙아도 하는 게 어떨까? 똥콩이가 똥을 안 싸면 그게 어떻게 똥콩이겠어. 그치? 달콩아. 천천히 가자. 기다려. 같이 가~


아무리 달콩이를 향해 하는 말이라지만, 달콩이는 내 종아리 높이까지 밖에 안 오는 데다가 아무런 반응조차 없으니,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쏟아내다가 나 혼자 머쓱하게 웃기도 한다.


이쯤 되니 나를 말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게 꼭 거짓말 같다. 달콩이 앞에서 나는 한없이 시끄러워진다. 할 말이 없을 땐 달콩이 이름이라도 반복적으로 부른다. 내가 부르는 달콩이의 이름은 여러 개다. 달콩이. 콩콩이. 똥콩이. 달똥이. 딸콩이. 당콩이. 땅콩이. 똥강아지 등등... 이 역시 훈련학적으로 안 좋다던데. '달콩!'하고 명확하게 부르는 게 좋다던데. 평소 반려견에게 안 좋다는 건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이것이 내가 달콩이에게 애정을 쏟는 방식이니 굳이 참지 는다.


달콩이에게 하는 말은 대게 쓸데없는 말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말들을 상냥한 말투로 건네다 보면 어느새 나의 마음도 몽글몽글 다정다감해진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없어도 기분이 좋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대답 없는 달콩이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한다.


혼잣아닌 혼잣말이 끝나면 나는 겸연쩍게 웃는다. 그러나 공백도 잠시. 달콩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나는 신이 나서 다시 조잘조잘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달콩이는 자신이 보호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그저 말간 눈을 한 채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반려견 놀이터에서. 달콩이와 대화를 시도 중.
매거진의 이전글 너를 돌보며 어른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