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길은 무지개다. 강릉만큼 다채로운 길을 품은 곳은 또 없을 터.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넘던 대관령 옛길, 푸른 바다를 보며 국내 최대 해안단구를 걸을 수 있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강릉의 상징인 소나무 아래를 걷는 바우길, 다섯 개의 달이 뜨는 호수 주위로 드리워진 경포호 산책길까지 각양각색이다. 강릉의 특별한 길을 두 발로 느껴 보자.
신사임당과 율곡의 발걸음을 따라
대관령 옛길
전국에 수많은 옛길이 있지만, 대관령 옛길만큼 귀한 길은 많지 않다. 태백산맥의 주요 고개로 영서와 영동을 나누는 대관령(해발 832m). 대관령 옛길은 조선시대 서울과 영동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으며, 천년 역사를 자랑한다. 태백산맥 줄기의 아름다운 자연과 흥미로운 이야기가 넘쳐나는 길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2010년 명승 제74호로 지정됐다.
출발은 국사성황사. 대관령 국사성황을 모신 서낭당으로, 강룽단오제 때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평소에도 대관령의 기운을 받기 위한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 찻길(옛 영동고속도로)이 나오면 횡단보도를 건넌다. 강릉 사람들이 ‘반쟁이’라고 부르는 반정이 나타난다. 대관령 고개의 중간이라는 뜻으로, ‘대관령 옛길 반정’이라는 큼지막한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 뒤로는 가슴이 뻥 뚫리는 풍광이 기다린다. 강릉 시내와 푸른 동해가 발아래 펼쳐진다.
반정부에서 숲길을 따라 300m쯤 내려가면, 유혜불망비가 등장한다. 향리 이병화가 험난한 대관령을 넘느라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주막을 설치했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주민들이 조선 순조 24년 공덕비를 세웠다. 공덕비 앞에 서서 이병화의 나눔의 정신을 생각한다.
대관령 옛길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국사성황사에서 반정, 유혜불망비, 주막터를 거쳐 하제민원에 이르는 6.46km 길은 시종일관 이야기가 흐른다.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다. 신사임당은 이 길에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담아 쓴 사친시를 남겼다. 김홍도는 백두대간과 경포호를 담은 대관령 그림을 남겼고, 송강 정철은 이 길을 걸으며 관동별곡을 썼다. 그 밖에도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을 선비와 괴나리봇짐을 지고 다녔을 보부상들을 상상하며 걷는다.
길은 구불구불 이어진다. 대관령 고개가 험해, 고개를 내려올 때 대굴대굴 구른다는 의미로 ‘대굴령’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깊은 숲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빼곡하다. 소나무와 굴참나무, 신갈나무 등 든든한 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옛길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주막 즈음에 닿으면 맑은 계곡을 만난다. 남대천의 자류로, 청아한 물소리에 마음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마지막 코스는 하제민원이다. 혼자 넘기에 위험했던 대관령을 10명이 모이면 통과시켜 주던 관문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코스는 하제민원까지가 끝이지만, 일반적으로 걷는 길은 대관령박물관까지다. 하제민원에서 대관령박물관까지는 1.54km 거리인데, 가는 길에 ‘원울이재’라는 언덕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강릉으로 부임하던 원님이 고갯길이 험해서 울고, 임기를 마치고 갈 때 강릉을 떠나는 게 아쉬워서 울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마지막으로 대관령박물관도 들러본다. 고인돌 형태의 외관이 눈길을 끄는 대관령박물관에는 2,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우길2구간(대관령옛길)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전화번호 : 033 336 4037
솔향에 취하다
바우길 15구간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철학자 루소의 걷기 예찬론이다. 강릉에는 생각을 멈추고 편안하게 걷기 좋은 ‘바우길’이 있다. ‘바우’는 강원도 방언으로 바위를 뜻한다. 친한 이를 ‘감자바우’라고도 부른다. 바우길이란 이름에는 그만큼 친근한 길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강릉의 산과 바다, 숲과 들판, 문화유적과 사람을 골고루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길이다.
강릉바우길 17개 코스 중 15구간은 ‘솔향강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코스다. 강릉수목원을 관통할 뿐만 아니라, 소나무 숲을 걷는 구간이 길다. 15구간은 성산면사무소부터 단오문화관까지 약 17.2km로, 난이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6~7시간 걸리는 코스로, 강릉수목원과 신복사지 삼층석탑이 주요 포인트다.
출발지인 성산면은 옛 영동고속도로 초입에 있어, 강릉을 찾는 이들이 거쳐 가는 지역이었다. 동사무소 앞에 바우길 표시가 있다.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걷기 시작한다. 도로를 지나 임도를 따라 걷는다. 햇살이 응원하듯 등에 따스하게 데워 준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즈음이면, 바우길 표시가 나타나 길을 인도한다. 적당한 거리에 등장해 주는 표시가 고맙다. 강릉 유기견 보호소에서 도로를 건넌 후, 가파른 길을 오른다. 오르막 다음에는 들판과 내리막이 기다린다. 소먹이가 될 풀들이 초록빛을 품고 있다. 초록 융단 사이를 씩씩하게 걷는다.
산북리 들판을 지나치면, 전나무 숲을 지나 금강송 숲길에 접어든다.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소나무와 하늘을 보기 위해서다. 숨도 크게 쉬어 본다. 시원한 기운이 들어온다. 소나무의 환영을 받으며, 강릉수목원으로 진입한다.
강릉수목원은 강릉의 자존심이다. ‘솔향강릉’ 브랜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이기도 하다. 칠성산 자락에 있던 금강소나무 원시림에 연계 시설을 조성해 만든 수목원으로, 자연스러움이 매력이다. 바우길은 강릉수목원 후문에서 정문으로 이어진다. 여유가 있다면 미리 해설을 신청해서 듣는 것도 추천한다.
수목원에서 나와 마을 길을 거쳐, 구정면으로 향한다. 거북이가 나온 우물이 있어 ‘구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로, 드넓은 여찬리 들판이 마음까지 넉넉하게 한다. 이곳에서 산길이 다시 시작된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조붓한 길이 이어진다.
폴리텍대학 정문을 지나 카센터 뒤에 있는 솔숲을 지나면 신라 고승 범일국사가 창건한 신복사지의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석불좌상(보물 제84호)이 나타난다. 석불좌상의 온화한 미소를 보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곳에서 남대천을 거쳐, 마지막 지하도를 지나면 종착점인 단오문화관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인증 스탬프까지 찍고 나면, 주마등처럼 길 위의 순간이 떠오르면서 행복감이 포르르 올라온다.
바우길15구간(강릉수목원가는길)
주소 : 강원 강릉시 성산면 구산길 22(성산면사무소)
전화번호 : 033 645 0990
웹사이트 : www.baugil.org
메타세콰이어 길에서 찰칵
경포생태저류지 & 경포호
경포생태저류지가 강릉 필수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봄에는 유채가 노랗게 피고 가을에는 하늘하늘한 코스모스가 펼쳐져 환상적인 풍광을 보여 준다. 저류지 가운데 키 큰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도 이곳의 인기 요소 중 하나다.
경포생태저류지는 비가 많이 내릴 경우 경포호에 유입되는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기본 목적 외에도 여행자와 주민들이 생태저류지를 즐길 수 있도록 꽃밭과 자전거길, 운동시설, 정자 등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은 인생숏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이미 유명하다. 여름에는 새파란 잎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고동색 잎이 멋진 배경을 만든다. 이곳을 산책하다 보면 유유히 유영하는 청둥오리와 원앙도 쉽게 마주친다. 억새 사이 우아하게 서 있는 백로도 눈에 들어온다. 많은 이들이 SNS용 사진을 남기러 왔다가 경포생태저류지에 반하는 이유다. 조성 목적은 따로 있지만, 아름다운 생태를 그대로 보여 준 덕분에 주민, 여행자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경포생태저류지를 둘러본 후에는 경포호로 향하자. ‘유리같이 맑은 호수’라는 뜻의 경포(鏡浦). 경포호는 바닷물이 갇혀 생긴 자연 호수로, 예부터 시인의 단골 소재였다. 조선 시대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경포호에는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임의 눈동자,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했다. 잔잔한 호수와 유려한 산의 능선, 소나무 숲과 누각이 어우러진 풍경 덕분에, 경포호 둘레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경포호에서 꼭 들러야 하는 곳이 경포대(보물 제2046호)다. ‘천하제일’이라고 쓰인 현판 아래 서면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포대에 서서, 현재 경포호의 랜드마크인 스카이베이호텔을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가 넘나든다. 경포대 부근에는 오디오 전문 박물관인 참소리박물관이 있다.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를 비롯해 진귀한 수집품이 즐비하다.
월파정도 찾아 보자. 경포호 가운데 있는 바위 위의 작은 누각으로, 경포호 사진을 찍을 때 월파정이 빠지는 법이 없다. 여름이면 연꽃이 가득 메우는 경포가시연습지도 꼭 들러야 한다. 경포호 산책로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시비 산책길, 50여 점의 조각 등 눈길 가는 곳이 많아,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가는 게 좋다. 경포호 둘레는 4km로 천천히 산책하기 적당하지만, 빠르게 돌아보고 싶다면 자전거를 이용하면 된다. 1인용 자전거뿐만 아니라, 2인용과 4인용 등 선택의 폭도 다양하다.
경포생태저류지
주소 : 강원 강릉시 죽헌동 745
경포호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저동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황홀한 산책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강릉의 바다를 특별하게 즐기고 싶다면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걸어야 한다. 정동진과 심곡항을 잇는 약 2.86km의 탐방로인 바다부채길은 거대한 바위를 따라 바다와 어깨동무하며 걷는 길이다. 바다 옆을 걷는 내내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풍광도 아름답지만, 천연기념물도 품고 있어 더 흥미롭다. 200~250만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에서 가장 긴 해안단구로, 천연기념물 437호로 지정돼 있다. 해안단구란 해안에 형성된 계단 형태의 지형을 말한다. 평탄한 표면과 반대로 주위는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부채길은 해안경비를 위해 오랫동안 출입을 통제했다. 탐방로를 개방한 이후 큰 인기를 끌었는데, 2020년 태풍 피해로 문을 닫았다가 2022년 10월 전면 재개장했다. 하늘에서 보면 땅 모양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이라 ‘바다부채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출발지는 정동진 썬크루즈 주차장과 심곡항 두 곳이다.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 같은 길을 걷지만, 심곡항에서 출발할 경우, 정동진보다 주차하기가 비교적 쉽고 바다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을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구간에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단점도 있다.
심곡항 매표소에서 계단을 오르면 심곡전망타워가 나타난다. 시작부터 동해의 깊고 푸른 바다에 마음을 뺏긴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드넓은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빨간 등대가 존재감을 나타내며 서 있고 왼쪽에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바위가 여행자를 반긴다.
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차르르 소리를 내는 몽돌 해변을 만난다. 해변으로 내려가진 못하지만, 잠시 서서 몽돌의 연주를 듣는다. 물이 빠져나간 몽돌은 보석처럼 빛난다. 다시 걷다 걸음을 멈추는 곳은 부채바위 앞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를 구석구석 살펴본다. 부채바위 전망대에는 벤치도 있으니,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긴 시간이 건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부채바위에서 20분쯤 걸으면 투구바위가 나타난다. 멀리서도 투구를 쓴 사람처럼 보인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사람을 잡아먹는 ‘육발호랑이’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부채바위와 투구바위 외에도 탐방로에는 독특한 바위가 즐비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비경이 기다린다. 친구와 함께 바위 이름 짓기 놀이를 하며, 추억도 쌓는다.
바닷길 끝 지점에는 소원을 비는 돌이 여럿 쌓여 있다. 놀라운 자연 앞에 사람들은 마음을 낮춘다. 마지막으로, 계단을 오를 차례다. 숨은 차지만 소나무 숲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탐방을 마친 후에는 셔틀버스를 이용해 심곡항으로 돌아간다.
심곡항에 도착해서는 환상적인 드라이브를 즐길 차례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도로로 알려진 헌화로는 금진해변에서 정동진항에 이르는 길로, 심곡항에서 금진해변까지는 해안도로다. 동해안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푸른 하늘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바다가 어우러진 길이다. 반짝이는 바다에 가슴이 촉촉해진다. 어부들의 배가 오가는 모습도 정겹다. <시그널> 등 여러 드라마의 배경으로도 등장했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주소: 강원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 114-3(심곡 매표소)
강원 강릉시 강동면 헌화로 950-39(정동진 매표소)
운영시간: 0900~16:30
가격: 5,000원
전화번호: 033 641 9444~5
홈페이지: searoad.gtdc.or.kr
*바다부채길 구간에는 화장실과 매점이 없으니, 미리 준비하고 산책을 시작하는 게 좋다. 기상 악화시 출입이 통제될 수 있으므로, 전화나 홈페이지로 개장 여부를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글 채지형, 사진 조성중 에디터 곽서희 기자
협찬·공동기획 강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