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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Nov 20. 2024

호주 ‘그램피언스’ 국립공원
탐험 일지

인터넷도 끊긴 호주의 깊은 숲속.
저 멀리 캥거루 떼가 말없이 이쪽을 응시한다. 
나의 탐험은 과연,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을까? 



ABOUT GRAMPIANS
주름진 늙은 산맥


휴대폰 상단, 5G 자리에 낯선 알파벳 세 글자가 떴다. ‘SOS’. 여기는 호주 빅토리아주의 그램피언스 국립공원. 사방에 초록이 너무 많아, 디지털 기기에 절여진 눈이 자연의 색에 씻겨져 내린다. 마치 지구의 몸속에 들어가 심장이라든지 허파 같은, 숨을 쉬게 하는 신체 기관을 찾아낸 기분이다. 지구가 숨 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였구나. 바깥세상과의 연결은 끊겼다. 업데이트되는 거라곤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해그림자의 기울기 정도. 분명 완전한 고립인데, 풍성히 우거진 나무들의 수호를 받는 것 같아 외롭지가 않다. 



멜버른에서 서쪽으로 3시간 반을 달렸을 뿐이다. 도시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차창 밖. ‘대체 이 초원의 끝은 어딜까’ 싶어질 즈음, 그램피언스 국립공원에 닿는다. 원주민 언어로는 가리워드(Gariwerd). 이름이 낯설 수밖에 없다. 멜버른에서 270km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그램피언스를 찾는 국제 관광객은 현재 5%가 겨우 될까 말까다. 나머지 95%는 전부 호주 현지인들이다. 로컬들만 찾는 진짜 ‘히든 스폿’. 그렇다 해도 여행의 난이도는 높지 않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행사의 일일 투어 상품들을 이용하는 것. 좀 더 진득히 머물고 싶다면 렌터카 자유여행도 도전해 볼 만하다. 



그램피언스, 일단 규모부터 당황스럽다. 무려 16만8,000헥타르다. 서울이 약 6만 헥타르 정도니, 서울을 두 개 합쳐도 택도 없다. 그런데도 빅토리아주엔 이보다 넓은 면적의 국립공원이 3개나 더 있다. 호주 전체로 보면 20개가 훌쩍 넘는다. 호주, 진짜 대단한 땅이다. 


‘장엄하다’는 첫인상은 단순히 규모에서만 비롯되는 건 아니다. 까마득한 역사도 한몫한다. 약 4억5,000만년 전 열대 기후 아래, 그램피언스 지역에서는 모래가 퇴적되어 사암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사암층은 3억년 전 지각 변동으로 인해 한껏 압축되고 주름지며 기울어졌다. 그램피언스의 4개의 주요 사암 산맥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늙은 산맥들. 그 잔줄의 깊이만큼 그램피언스는 유구한 세월을 살아냈다. 새벽녘 태양빛을 받으면, 산봉우리의 주름은 더 붉고 선명해진다. 자신의 존재를 저 스스로에게 입증해 보이듯 조용히 타오른다. 몹시 나이 들어, 사는 것의 황홀함을 아는 자연의 모습이다. 



온 천지가 사암이니 전 세계 암벽 등반가들에겐 꿈 같은 장소다. 튼튼하고 안정적인 사암, 다양한 난이도의 등반 루트. 거기에 황홀한 경치까지?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램피언스의 암석은 역사서의 역할도 한다. 호주 남부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고대 원주민 암벽화를 간직한 곳이 바로 그램피언스다. 수천 년 전 원주민 문화와 신화, 당시의 시대상이 까슬한 벽면 가득 기록돼 있다. 총 60개 이상의 암벽화 중 현재 일반에 공개된 건 5점. 원주민과 그램피언스의 오랜 관계의 증거를 엿보는 일은 그램피언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다. 



가뜩이나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원시시대로 돌아간 분위기인데. 잘 터지지 않는 인터넷은 탐험의 재미를 더 고조시킨다. 조금만 높은 고도로 올라가거나 계곡 근처만 가도 휴대폰은 금세 먹통이 된다. 와이파이로부터의 해방. 나와 자연 간의 고요한 독대. 도시에선 꿈만 꾸던 공상이 너무나 쉽게 현실이 되는 순간. 그램피언스 관광 정보 센터(Grampians Visitor Information Centre) 또는 공원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가이드 서비스를 신청하면 다행히 ‘SOS’스러운 상황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있다.  
 


GRAMPIANS PEAKS TRAIL
하이킹 경험의 진수


드넓은 산맥, 웅장한 대자연…. 다 좋은데, 여행자 입장에선 현실적인 고민이 잇따른다. 16만8,000헥타르의 국립공원을 도대체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 자전거, 클라이밍, 캠핑, 하이킹에 이르기까지 선택지는 넓다. 운전만 할 수 있다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를 수 있는 전망대도 많다. 그래도 역시 그램피언스의 ‘속살’을 보려면, 두 발로 구석구석 깊은 지점까지 누비는 게 최고다. 그리고 그 하이킹 경험의 진수를 모아 놓은 게, 그램피언스 피크 트레일이다. 



2021년 12월에 공개된 그램피언스 피크 트레일은 국립공원의 다양한 지형을 통과하는 12박 13일짜리 장거리 하이킹 코스다. 전체 길이만 약 164km. 총 13개 구간에 걸쳐 진행되는데, 거쳐가는 지점을 보면 거의 웬만한 액션 어드벤처 게임 못지않다. 가파른 오르막, 거친 트랙 표면, 험준한 산봉우리에 울퉁불퉁한 바위 능선…. 일부 구간은 5등급 수준의 전문가 코스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경험에, 체력(HP)에, 탐험 지식까지 갖춘 자만이 정복할 수 있는 외진 지역도 있다. 호주인들 중에선 중간중간 캠프 사이트에서 숙박하면서 13개 구간을 퀘스트 깨듯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는 이들도 많다고. 하긴,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캠프장 예약 방법과 코스 지도, 주의사항 등이 자세히 나와 있으니 겁먹을 필욘 없겠다. 물론 시간도 체력도 부족한 여행자는 난이도 최하 구간을 택해 ‘찍먹’해 보는 걸로 만족하면 된다. 튜토리얼만으로도 충분하다.



호주는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다. 하이킹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가을(4~5월)과 봄(9~11월). 특히 매년 8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그램피언스는 약 700종 이상의 야생화가 만개하는 거대한 야생화 정원이 된다. 반면 12월부터 2월까지는 여름철 고온 건조한 날씨로 산불 위험이 높다. 하이킹 중 하얗게 뼈대만 남은 나무를 만난다면 높은 확률로 불타 버린 유칼립투스 나무다. 



사람의 손은 트레일에 최소한으로만 닿았다.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다. 땅은 고르지 않고 암석은 느슨하다. 나뭇가지와 잔해들이 어지러이 쓰러져 있는가 하면, 무성한 덤불이 대뜸 길을 가로막는다. 암석 계단은 인위적인 볼트 하나 사용하지 않고 지어졌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모습. 힘들여 꾸미지 않은 순리. 인간은 그걸 ‘자연스럽다’고 일컫고 그램피언스는 정말이지, ‘자연스러운 자연’ 그 자체다.
 


KANGAROO HABITAT
내 인생 가장 긴 눈싸움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생명이 모이는 건 자연의 이치다. 그램피언스에는 970종의 자생 식물, 230종의 조류, 40종의 포유류 등이 살고 있다. 붓꼬리바위왈라비(Brush-tailed Rock-wallaby)와 큰솔부엉이(Powerful owl)를 포함한 50종의 멸종 위기종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립공원 전역에 걸쳐 곳곳에서 목격된다. 근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은 단연, 캥거루다. 



캥거루들에게 그램피언스란 24시간 운영되는 뷔페다. 그램피언스에는 캥거루의 최애 식량인 풀과 나뭇잎이 풍부한데다 마실 물도 넘쳐난다. 마라탕과 제로 콜라가 사방에 깔린 곳이라면, 나 같아도 주저앉아 터전으로 삼을 것 같다. 게다가 대형 맹금류 같은 천적도 상대적으로 적다. 숲과 바위 지형이 많아 안전하게 휴식할 수 있는 피난처도 널렸다. 캥거루는 한 번의 점프로 최대 3m 이상 뛰어오를 수 있고, 9m까지 멀리 이동할 수 있다. 시속 60km 이상으로 달릴 때도 많다. 그만큼 이동 범위가 넓은데, 그램피언스는 이마저도 갖췄다. 공원 내에는 그들이 마음껏 내달릴 수 있는 초원이 천지다. 방해되는 인간도 없고 기후까지 온화하니 뭐, 사실 이쯤 되면 도시에 사는 캥거루들이 불쌍해질 지경이다.



브램북 안내소(Brambuk Centre) 인근의 너른 평원. 땅바닥부터 심상치 않다. 풀 반, 똥 반. 고개를 드니 저멀리 배설물의 주인들이 꼬리를 늘어뜨리고 한창 먹방 중이다. 누구는 옆구리를 벅벅 긁고 있고 누군 먹은 걸 부지런히 내보낸다. 어림잡아 50마리는 되어 보이는 캥거루들이다. 동물원 캥거루가 아닌, 진짜 ‘야생’ 캥거루. 



사람을 봐도 별 감흥이 없거나 반대로 엄청 반기는 캥거루는 100이면 100, 동물원에서 사람 손에 길들여진 녀석들이다. 야생 캥거루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일단 인간을 쳐다본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마냥 놀란 눈으로. 뚫어질 듯, 어리둥절하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라도 띄운 듯 ‘??’ 하고 응시한다. 카메라라도 들이대면 더 빤히 렌즈를 본다. 괜히 머쓱하게시리. 내 인생 가장 긴 눈싸움을, 그램피언스의 한 평원에서 캥거루와 했다. 



캥거루는 선천적으로 조심스러운 동물이다. 소심하고 겁 많고, 경계심은 더 많다. 그래서 늘 주변의 위험 요소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조그만 환경의 변화에도 민감하다. 뾰족한 귀로는 위협이 될 만한 소리나 움직임을 빠르게 감지한다. 그들의 생존 전략은 ‘숨기’와 ‘피신’. 낌새가 수상하다 싶으면 냅다 숨거나 달리고 본다. 보통의 캥거루들은 군체를 형성해 살아간다. 군체 내에서 누군가가 위험을 감지하면 다른 캥거루들에게 경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고. 캥거루가 그렇게 날 주시한 이유를 이제 좀 알겠다. 호기심과 두려움, 긴장감과 궁금증. 그들의 눈빛은 그 모든 종합체였던 거다. 



아무튼, 문제는 그 말 없는 응시가 이유 없이 귀엽다는 거. 너무 귀여운 나머지 달려가 마구 괴롭히고 싶어지는 마음을 참기란, 아무리 고도로 문명화된 인간일지라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없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동동거리는 내게 해설사가 말했다. “유튜브에서 캥거루들끼리 복서처럼 서로 치고받는 영상 보셨죠? 그거 실화예요. 호주에선 야생 캥거루들이 진짜 그렇게 싸워요. 보고 있음 엄청 웃기죠.” 캥거루의 발차기는 한 방에 1,000kg의 압력을 발생시킨단다. 한 대 맞으면 갈비뼈쯤은 가뿐히 부러지고도 남는 파워다. 귀여운 외모에 그렇지 않은 뒷발당수. 음, 그냥 먼발치에서만 귀여워하는 게 피차 좋겠다.
 


HALLS GAP LAKESIDE TOURIST PARK
만남을 ‘당하는’ 캠핑장


그램피언스 국립공원 근처의 캠핑장 중 유독 인기가 많은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할스 갭 레이크사이드 투어리스트 파크다. 숙박 시설은 두 종류로 나뉜다. 주방과 욕실과 침대를 갖춘 캐빈, 그리고 텐트 또는 캠핑카를 위한 캠프장. 바비큐 시설과 캠프파이어 등 캠핑에 필요한 모든 여건은 다 갖춰져 있다. 화장실과 샤워 시설도 상당히 깔끔하다. 근데 시설은 둘째치고, 여기엔 훨씬 더 강력한 장점이 있다. 야생 동물들을 코앞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사실 ‘만난다’보단 ‘만남을 당한다’는 표현이 더 맞다. 마치 자기들이 원래 이곳의 주인이라는 듯(맞는 말이긴 하지만) 아무 때나 불쑥불쑥 찾아온다. 캐빈 앞 발코니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새가 있다면 99%, 붉은꼬리검정관앵무(Red-tailed Black Cockatoo)다. 휘휘 손으로 내쫓아 봐도 씨알도 안 먹힌다. 새벽에 현관문을 열면 왈라비가 문 앞에 있다. 딱히 뭘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멀뚱히 서 있다. 얌전히 앞마당을 걷는 에뮤는 그나마 양반이다. 바비큐 구울 땐 턱수염도마뱀(Eastern Bearded Dragon)이 옆에서 고기 뒤집는 걸 한참 구경하더라. 밤이면 멀리서 알 수 없는 동물들의 포효가 돌비 서라운드로 들린다. 꼭 박물관에서 녹음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 같은 야생의 소리다. 아침 7시만 되면 각종 새들의 모닝콜이 시작된다. 밖에 나가 보면 밤새 말려 놓은 빨랫감 위에 쿠카부라(Kookaburra)가 뻔뻔하게 앉아 있다.



애써 찾지 않아도 늘 곁에 있던 녀석들. 처음엔 놀랍다가 적응되면 익숙하고, 떠날 때면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성수기면 한 달 단위로 캠핑장이 풀부킹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 



저녁 8시, 캥거루 떼에 둘러싸여 캠핑하는 밤. 새벽 2시는 된 듯 아득한 어둠이다. 누군가가 지핀 캠프파이어가 공기 중에 낙엽 타는 냄새를 섞는다. 가을달이 뜬 돌산 아래, 사슴이 겅중겅중 뛰어간다. 에뮤들도 잠을 자러 숲속으로 떠난 자리, 하늘엔 은하수가 파도치듯 흐른다. 참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다.




MOUNT WILLIAM STATION
시골 목장에서의 하룻밤


처음엔 누가 소들을 학대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귓구멍에 울려 퍼진 ‘우(牛)케스트라’ 때문이다. 움머어― 움머어―. 수십 마리의 소들이 밤새도록 줄기차게도 울어댔다. 알고 보니 그게 소들만의 의사소통 방식이란다. 무슨 수다를 그렇게도 떠는지. 그램피언스 시골 목장에서의 하룻밤. 거참, 신고식 한번 요란스럽다.



여기는 마운트 윌리엄 스테이션. 그램피언스 국립공원 근처에 위치한 대규모 목장이다. 19세기 초반에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도 7,500에이커 규모의 땅에 셀 수 없이 많은 소와 양을 길러 내고 있다. 그중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건 흰색 샤롤레종(Charolais). 빅토리아주에서는 희귀한 고기소 품종으로, 우람한 체구에 온순한 성격, 크림색 털을 가졌다. 육질이 부드럽고 마블링이 적어 고급 육류로 평가받는다고. 목장 주인인 윌 애보트(Will Abbott) 씨가 가족 대대로 샤롤레종을 번식시키는 일을 해 오고 있다. 

그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1990년대에 증조부께서 매입한 이 목장의 일부를 호텔로 멋지게 변신시킨 장본인도 바로 윌이다. 호텔은 목장 한가운데에 있다. 사실 말이 호텔이지, 거의 마음씨 좋은 지인의 집 빈방에서 하룻밤 신세 지는 느낌이다. 객실 키도, 로비도 없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따뜻하다. 



부지는 크게 2개로 나뉜다. ‘홈스테드(Homestead)’와 ‘양치기 숙소(Shearers’ Quarters)’. 둘의 성격이 꽤 다르다. 홈스테드는 리노베이션을 거쳐서 모던하다. 객실 수는 총 7개. 호텔이기 전에 워낙 오랫동안 4대에 걸쳐 대가족이 살았던 ‘집’이라 객실마다 스토리가 담겨 있다. 윌의 할머니가 정성껏 꾸민 방도 있고, 그의 어머니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방도 있다. 나는 대형 금고와 총기를 보관하던 옛 사무실을 개조한 객실에서 머물렀다. 다행히(?) 지금은 총기가 있던 자리에 아늑한 벽난로가 있다. 더 자세한 스토리를 듣고 싶다면 숙소 예약시 윌의 농장 투어를 신청해 볼 것. 참고로, 마운트 윌리엄 스테이션은 광활한 농장이기도 하다.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는데, 특히 올리브와 꿀이 진짜 ‘꿀맛’이다. 홈스테드의 투숙객에겐 홈메이드 올리브오일과 농장에서 따온 식재료로 만든 요리가 매일 밤 2코스의 저녁 식사로 제공된다. 멋 부리지 않아 더 좋은 맛이다. 



정제된 시골 말고 ‘찐’ 시골을 경험하고 싶다면 홈스테드로부터 약 750m 떨어져 있는 양치기 숙소가 딱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때 실제로 농장에서 일하던 양털 깎는 사람과 일꾼들이 살았던 곳이다. 물론 여기도 현대화되긴 했지만, 홈스테드에 비하면 훨씬 빈티지한 분위기다. 더 소박하고, 더 아늑하다. 8개의 침실과 3개의 욕실, 공용 생활 공간이 있어 단체 여행객이 통째로 빌리기에도 좋다. 근데 치명적인 단점 하나. 소와의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 창문 바로 바깥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수준. 홈스테드에서보다 더 높은 데시벨로 ‘우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다. 덕분에 아무리 지독한 불면증 환자일지라도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저녁 8시에 자는 농경 민족의 삶이 가능해진다. 


홈스테드 뒤편, 블루스톤 마구간 뒤로 해가 넘어간다. 윌이 따라 준 그램피언스 와인 한 잔. 모닥불에 구운 마시멜로를 곁들이니 술맛이 달다. 저녁 바람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흔들린다. 여전히 말 많은 소들은 수다 삼매경이고. 한평생을 빌딩 숲에서 살던 도시인에겐 모든 게 낯설기만 한 풍경인데, 한밤 잤다고 그새 좀 익숙해졌다. 여행에서 익숙함은 곧 떠날 때가 됐다는 뜻이다. 그램피언스에서의 탐험이 끝나감을 번져 가는 노을이 알려 주고 있었다. 



‘탐험’. 미지의 땅을 조사하고 탐색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다. 지난 며칠간 그램피언스라는 미지의 땅을 신나게 누볐다. SNS 대신 뜨던 SOS 신호. 줄지 않던 휴대폰 배터리와 자고 나면 100%로 충전되던 호기심. 그 호기심을 매 순간 충족시켜 주던 그램피언스의 대자연. 그 광활한 품 안에서 나는 참 많이도 걸었고, 적잖이 놀랐다. 이 땅에 경외와 경애의 마음을 동시에 바치며, 어느 때보다 풍족한 마음으로 탐험 일지를 마친다.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한 것 같다. 이만하면 이번 탐험, 대성공이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호주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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