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채지형 씨 부부가 말하는 신혼여행
10년 연상연하인 쿠키와 브루스 커플. 둘이 합쳐 100개국을 넘게 여행한 자타공인 여행중독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부부가 된 이들은 장장 6개월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말한다. 신혼여행은 길수록 좋은 거라고. 과연 그러한가. ‘팩트체크’를 시작해 보자.
브루스(조성중)
‘훈자’가 제2의 고향이라는 여행자. 현재 일상으로 착륙 중.
쿠키(채지형)
여행작가. 1994년부터 10권 이상의 여행책을 출간했다.
쿠키와 브루스의 신혼여행 루트
남인도 코친에서 시작해 바르칼라, 트리반드룸, 칸야쿠마리, 델리, 암리차르 그리고 파키스탄 훈자와 페샤와르, 길깃, 아보타바드, 이슬라마바드, 라호르를 거쳐 다시 북인도 맥그로드 간즈, 델리, 바라나시, 아그라를 돌아보고 다시 델리로 돌아와 인도 여행을 마무리했다. 다음으로는 몰디브와 스리랑카의 네곰보, 캔디, 덤블라, 시기리아, 하푸탈레, 함베가무와, 미리사, 갈레를 여행하고 콜롬보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3월5일이었다. 여행작가 쿠키(채지형), 여행자 브루스(조성중)가 아내와 남편이 되었다. 유명한 ‘여행 남녀’의 결합인지라 그들의 신혼여행이 궁금했다. 그러나 부부와의 대면을 위해서 무려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3월6일 출국해 6월30일에 귀국한 부부는 오자마다 다시 광주의 처가를 거쳐 제주도로 내려가 한동안 머물다 돌아왔다. 그리하여 이들이 말하는 신혼여행의 공식적인 마침표는 9월3일에 찍혔다. 해외 4개월을 포함해 거의 6개월간의 신혼여행이었고,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여행 루트를 들어 보니 여행기자 18년차인 내게도 온통 생소한 이름들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더라
우선, 러브스토리를 들어 보자. 발단은 쿠키의 훈자(Hunza) 여행이었다. 파키스탄 북부 훈자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이유로 ‘블랙홀’이라고도 불리는 곳. 해발고도 6,000m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라,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거친 산길을 따라 버스로 24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세세한 여행정보가 귀한 지역이라 쿠키는 적임자를 수소문했고, 그가 바로 브루스였다고. 그는 파키스탄의 언어인 우르두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여행전문가들이 인정하는 파키스탄 ‘통’이었다. 그렇게 브루스의 친절한 여행 훈수가 시작되었고, 그 결실은 2년 2개월 후 결혼으로 맺어졌다. 80여개 국을 여행한 71년생 여행작가 쿠키, 8년 동안 온전히 여행자로만 살아온 81년생 브루스는 그렇게 커플이 되었다.
쿠키에게 물었다. 브루스의 매력이 뭐였냐고. “몸도 마음도 건강했어요. 무엇보다 생각이 건전해요.” 브루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내는 에너지가 넘쳐요. 작은 부분에도 행복해 하고요. 언제나 적극적이고 유쾌해요.”
훈자라는 블랙홀에서 탄생한 커플의 신혼여행은 자연스레 훈자를 향해 빨려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 북부 훈자로 들어가는 시기는 브루스의 치밀한 계획 아래 ‘살구꽃 개화기’와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누가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겠는가. 살구꽃이 피려면 아직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후의 일정 전체가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소식이었다.
“많이 속상했어요. 아내에게 훈자마을을 가득 채운 봄의 살구꽃을 꼭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여행이 항상 그렇듯 계획은 쉽게 배신하니까요. 그래서 괜히 혼자 미안한 거죠. 그럴수록 예민해졌던 것 같아요.”
“좋은 마음 때문에, 많이 싸웠어요. 이미 잘 아니까, 최고의 것을 보여 주고 싶고, 그래서 점점 부담이 커지는 거죠. 근데 사실 저는 아무 상관없었어요. 그냥 다 좋았거든요.”
여행 중에 함께 사모사(튀김만두와 비슷한 인도요리)를 먹으며 어울려 지냈던 변종모 작가의 책 제목이 딱 떨어진다. 정녕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었다.
*우르두어(Urdu) | 파키스탄 공용어 중 하나. 힌디어와 비슷하지만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남편이 말하길
24시간, 모든 순간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말한다. ‘아내의 24시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아내는 소문난 수집가, 메모광, 여행중독자이자 부지런한 여행작가다. 이 모든 것은 지난해 작고하신 장인어른에게서 이어받은 DNA다. 심지어 둘이서 작게 싸운 날에는 별 하나, 크게 싸운 날에는 별 세 개를 일기장에 그려 넣는 걸 브루스가 봤단다.
쿠키는 20년을 훌쩍 넘긴 여행작가다. IT 기자로 시작해 관련 서적을 출판하면서, 일찍이 저자로 데뷔했고, 국내 굴지의 통신IT 회사에서 콘텐츠 개발자로 일하는 동안에도 한국여행작가협회 소속의 여행작가로 출판 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여행작가가 된 것은 3~4년 전의 일인데, 오라는 곳도 많고, 갈 곳도 많은 유명 여행작가다.
“저는 여행을 하면서 체험이란 걸 별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아내는 모든 것을 다 해 보는 사람이에요. 춤도 막 추고요.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지만, 막상 해 보니 재밌더라고요.”
항상 혼자서 여행하면서도 브루스는 불편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감정표현도 메말라 가고 있었다. 자신도 몰랐지만 외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쿠키와 함께한 여행에서는 소소한 모든 순간이 좋았다. 인도 코친에서 쿠키가 얼굴에 녹색 카타칼리* 분장을 했을 때는 인도 사람들조차 몰려들어 폰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고.
*카타칼리(Kathakali) | 인도 케랄라주의 전통 춤. 라마야나 혹은 마하바라타 대서사시의 내용을 팬터마임과 무용으로 표현하는데, 분장과 의상이 화려하다.
아내가 말하길
나는 프라이팬을 들고 다니는 남자와 결혼했다!
여행 중 어느날 쿠키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후라이팬을 들고 다니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사실 신혼집으로 들고 온 남편의 이삿짐은 100리터 배낭, 80리터 배낭, 60리터 배낭 등등과 그 속을 꽉 채운 2인용 텐트, 1인용 텐트, 사계절용 텐트, 동계용 침낭, 하계용 침낭 그리고 코펠 등등의 캠핑장비가 대부분이었다고.
충남 부여에서 시골소년으로 자라 평범하게 학업을 마치고 직장에 다녔던 브루스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어느날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난 후 브루스는 5년간의 직장 생활을 바로 청산했다. 그리고 8년 동안 그는 여행만 했다. “책을 읽고 보니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얻는 것은 모두 나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한 거였어요. 그래서 하고 싶을 것을 하면서 살아 보자 결심했어요.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죠. 처음엔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나중엔 인도, 파키스탄에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훈자에서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빈둥빈둥거린 날도 많으니까 어떻게 보면 한심하게 보낸 시간도 있었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것들을 거의 다 했으니까요.”
종종 경제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물어보는데, 프라이팬까지 들고 인도와 파키스탄을 여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이 배운 사진은 누가 봐도 수준급인데, 브루스는 아직 세상에 내놓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우쭐함도, 과장도 없다. 그런 브루스가 쿠키에겐 ‘처음 만나는 세상’이다. 그의 여행법도 그렇고, 여행과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브루스의 시선도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고, 그걸로 끝이잖아요. 브루스는 그 사진들을 가지고 현지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요. 그곳에서 추억만 가지고 떠나 버리는 여행자가 되지 않겠다는 거예요. 혼자 길게 여행한 만큼 더 성숙한 사람이에요.”
여행이라는 밀실에서 따로 또 같이
“자유 시간을 줄께! 나가서 놀고 와!”
결혼 4일 만에 나온 쿠키의 선언이다. 여행 중에 엽서 쓰기를 즐기는 쿠키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 <야행>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밀실에 갇히는 것’이라고요. 진짜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브루스에게 자유시간을 갖자고 했어요.” 정작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처음엔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아내의 습관에서 배운 것이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그도 기록을 시작했다.
그래도 이들의 밀실은 행복하기만 했다. 울타르 메도우 트레킹*이 그러했다. 쿠키와 브루스는 각각 이 코스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것을 느꼈었다.
“여행하면서 압도적인 풍경을 마주하고는 혼자 가슴을 눌러야 했던 벅찬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막연히 ‘누군가와 이 풍광을 함께 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곳을 아내와 같이 가니까 감격과 환희의 순간이 정말 2배가 되었어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지로 훈자를 추천하느냐고 물으니 브루스가 고래를 설레설레 흔든다.
“신혼여행이요? 그야 몰디브죠! 에어컨도 나오고 천국이던데요. 하하하.”
갑자기 웬 몰디브인가. 지금껏 나열되던 생소한 오지들과 너무나 결이 다른 여행지였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잘 아는 곳들을 여행하다 보니, 오히려 배려가 지나쳐 다툼이 되는 일들이 잦아졌던 것. 성품이 순한 쿠키가 어느날 참다못해 부들부들 떨면서 외친 한마디! “나도 소리 지를 줄 알아!”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부르스는 너무나 미안했다고.
그래서 부부는 ‘탈출’을 감행했다. 두 사람이 모두 여행해 보지 않은 곳에 가기로 했다. 그곳이 몰디브였고, 스리랑카였다. 서로 공평하게 낯선 곳에 떨어지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는 것이 없으니 먼저 걱정할 것도, 애쓸 것도 없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원 없이, 걱정 없이 쉬었다.
*훈자에 있는 울타르 피크(Ultar Peak)는 해발 7,388m의 봉우리지만 울타르 메도우(Ultar Meadow) 빙하 트레킹의 목적지는 해발 3,280m 정도의 고지다. 그 초원에 서면 7,000m 이상의 산이 눈앞에 떡하니 등장한다.
네버엔딩 여행, 네버엔딩 사랑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쿠키는 여행을 업으로 강의와 집필을 하고, 브루스는 한옥 건축과 현대 건축을 모두 섭렵하는 목수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다. 버킷리스트가 다시 채워질 때까지 당분간 긴 여행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두 사람의 여행병은 사랑만큼 깊다. 지난 긴 추석 연휴 동안 브루스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은 여러 개의 배낭 꾸러미와 1.8리터 생수통 한 박스였다. 또 누구네 집의 옥상 혹은 어딘가 식수도 없는 곳에 텐트를 치고 누운 부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돌아와서도 여행하는 건 비슷해요.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이 한국에 찾아오면 초대도 하고, 같이 여행도 해요. 최근에 티베트에서, 맥그로드 간즈에서 만난 친구들이 왔었죠.”
판매부수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도록 쿠키는 독립 출판을 준비 중이다. 아마도 이 신혼여행 이야기가 담길 것이다. 그래서 더 상품화하지 않고 싶다. 남편도 언젠가는 사진집을 낼 계획이다.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여행 중에 만난 결혼 27년차 선배 부부가 그러시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싸운 게 오늘 아침이라고요. 신혼여행을 길게 다녀온 건 참 잘한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둘이 평생 할 이야기가 생기는 거잖아요. 둘이 앉아서 하루 종일 이야기만 한 날도 많았어요. 신혼여행에서 행복한 추억을 많이 쌓아 두면, 결혼의 시작도 행복하게 새겨지는 거죠.”
글 천소현 기자 인터뷰 사진 Photographer 유운상 자료사진 채지형, 조성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