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빠한테 한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 'ㅇㅇ아 할머니 돌아가셨다. 문자보는대로 내려왔으면....' '아빠 저 준비하고 바로 내려갈게요..' 무거운 마음으로 직장에 연락을 하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준비하면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 아직 완전히 실감 나진 않았었지만, 벌써부터 아빠가 겪고 계실 상실감이 떠올라 계속 걱정이 되었다.
할머니는 1936년에 태어나셨다. 1957년 큰 아들을 얻고 총 아들 넷, 딸 넷 이렇게 8남매를 낳으셨다. 그중 아빠 형이 되시는 아들 한 명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아빠 여동생 중 한 명(나에겐 고모)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런데 술을 좋아하시고, 듣기로는 한량 스타일이셨던 할아버지는 간경화로 42세 때(막내 아들인, 1970년생이신 우리 아빠가 아직 미취학 아동일 때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8남매를 낳고, 7남매를 성인이 될 때까지 거의 홀로 기르신 것이다.
한글도 모르셨던 할머니는 홀로 7남매를 어떻게든 먹여 살리고 가르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셨다. 증조할머니(아빠한텐 할머니)께 한 살배기 막내 고모를 맡기고 하루에 3~4시간만 주무시면서, 돈을 벌러 온갖 일을 다니셨다고 한다. 그렇게 일만 하시다가 나이가 드시면서는 골병이 들어 아픈 곳이 늘어만 가셨다. 내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할머니는 많은 약을 드셨었고, 만날 때마다 이곳저곳 아프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부턴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지막 몇 년은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찾아갈 때마다 나는 할머니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눈물을 흘렸다.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는 말씀도 잃으셨다. 자식을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으셨고,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으셨다. 옛 여인들의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와 10대 시절 한국전쟁을 겪고, 임신과 출산을 8번 반복하고, 그중 2번이나 자식들을 잃는 아픔도 겪으시고, 젊은 시절은 온통 자식들을 책임지시느라 당신 몸이 부서지랴 일만 하신 데다가 나이가 들어선 온몸이 아프기만 하고 나중엔 정신까지 흐려지신 할머니.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렇게도 열심히 사신 덕분에 많은 자식들은 모두 잘 크고, 결혼도 해서 손자, 손녀들을 모두 둘씩 낳아 우리 친척들은 대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잔인한 사실이지만, 막내아들의 딸인 어린 내가 보기에(큰아버지와 아빠의 나이차이가 10살이 넘게 나서, 제일 큰 사촌 오빠와 나는 띠동갑이다) 모든 자식들이 잘 된 건 아니다. 첫째 아들인 큰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며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셨다. 형제들에게 돈을 빌린 일도 잦아 만나서 술만 마시면 형제간에 큰 싸움이 일어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막내아들인 우리 아빠가 나중에는 이 집안의 기둥 역할을 다 해내셨다. 유독 머리가 좋고 할머니의 강한 생활력과 책임감을 물려받아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참 열심히 사셨던 우리 아빠. 아빠 덕분에 할머니는 89세까지 사실 수 있었다. 아빠가 없었다면, 할머니는 10년 전쯤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에는 아빠의 지인분들이 굉장히 많이 찾아와 주셨다. 그중에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슬픈 와중에도 그동안 아빠가 성실히 살아온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같아 든든함과 존경,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입관 전까지 아빠는 강한 슬픔을 숨기며, 묵묵히 유족 대표 역할을 해내셨다. 그러다가 3일장 일정 중 둘째 날, 입관의 때가 왔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차갑게 식어 곧은 자세로 수의를 입고 계셨다. 들어가자마자 눈물이 났다. 장례지도사가 다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시간이니,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어도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말했다. 고모들이 먼저 할머니를 끌어안고 오열하셨다. "엄마..! 엄마! 미안해... 엄마 너무 사랑해.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너무 고마웠어. 엄마...! 고생만 하시고, 불쌍한 우리 엄마. 거기 가서는 편히 쉬어. 엄마 우리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 엄마..!" 아빠도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며 할머니를 끌어안고 오열하셨다. 나는 아빠가 슬퍼하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몸을 들썩이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 너무 미안해. 엄마..! 나 정말 한다고 했는데, 엄마가 해 준 거의 십 분의 일도 나는 못 한 것 같아. 엄마..!"
평소 감정 표현, 특히 '슬프다'라는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아빠였기 때문에, 그렇게 울며 슬퍼하는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 우리 아빠는 다른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효자였다. 아빠는 '키워주셨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한 거다'라고만 말했고 다른 이야기는 해 주신 적이 없어 내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아빠는 할머니에게 강한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또한 부모라는 존재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 험한 세상에서 할머니는 아빠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고모랑 엄마 아빠는 '부모님이 아무리 쇠약해지셨어도, 이 세상에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그래도 힘이 된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었다.
우리에겐 아빠, 고모, 5, 60대인 분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그러듯이 '엄마'를 목놓아 부르며 통곡하셨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에 눈물이 고인다. '과연 자식은 아무리 크고 나이가 들어도 자식이구나...' 회자정리라고 했던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부모님과의 이별을 겪고 있는 아빠의 심정을 깊게 같이 느끼며,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겪을 일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 아파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내가 아빠를 아무리 사랑하고 위로해 준다고 해도 아빠가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은 내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인간 실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죽은 이를 떠나보낸 슬픔과 그리움은 오로지 남은, 산 자들의 몫임을 느끼며 말이다. 그리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별과 고통,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게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3일장을 모두 치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피곤에 지친 몸을 쉬게 해 주고, 나도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빠도 모두가 겪는, 또 언젠간 겪을 그 상실감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잘 승화해서, 더 기운내고 같이 잘 살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할머니, 사시는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할머니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겠죠. 감사하고 또 존경합니다. 그곳에서는 편히 쉬세요.. 할머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