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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윤 Dec 03. 2023

'육각형'을 요구하는 사회

트렌드 코리아 2024 (3) 육각형 인간

‘육각형 연예인’ ‘육각형 운동선수’ ‘육각형 남자(여자)’…. 



최근 ‘육각형’이란 단어를 많이 접하게 된다. 사람뿐만 아니라 ‘육각형 자동차’나 ‘육각형 아파트’처럼 제품에도 육각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케팅 용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육각형이 도대체 뭘까?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완벽하다’는 의미다.


육각형이란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언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을 보면, 축구게임에서 선수를 언급하며 전술·집중력·체력 등 경기에 필요한 여러 능력을 고루 갖춘 경우 ‘육각형 선수’라고 표현했다. 반드시 여섯 개일 필요는 없지만 서너 개가 넘어가는 다차원의 능력치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육각형 그래프(혹은 레이더 그래프)에서 어느 한 각만 뾰족한 게 아니라 두루 채워진 것을 비유해 나타낸 말이다.


육각형 운동선수, 육각형 개발자 ...



사실 ‘육각형’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됐을 때는 사람이 어떤 면은 뛰어나지만 또 다른 면은 부족하기 마련이므로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춘 이가 드물다는 의미에서 쓰였다. 그런데 최근엔 그런 의식에 변화가 감지된다. 오히려 육각형이 모두 채워져야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고,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결격 사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명 ‘육각형 인간’의 사회다.




육각형 인간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이든 수치로 평가하며 서열화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신의 연봉이 대한민국에서 상위 몇 퍼센트인가를 물어보며 위치를 확인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눈에 자주 띈다. 연인을 찾고자 하는 데이팅 앱에서는 학력, 소득, 직업 등에 따라 프로필에 인증 배지를 달아 준다. 외모를 점수화하기도 한다. 서비스에 가입한 회원들 간에 외모 점수를 평가해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들 경우 인정받는 것이다.



아무나 쉽게 선망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명 ‘담쌓기’가 벌어지기도 한다.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나야 하는 조건까지 충족할 때 선망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재벌 3세’는 요즘 사람들에게 자수성가형 사업가보다 큰 관심을 받는다. 어린 시절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그들의 일상을 팔로우(follow)하고 그들이 들고 나오는 아이템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경은 ‘올드머니 룩’이라는 패션 스타일에도 반영된다. ‘올드머니(old money)’란 전통적인 부자를 일컫는 말인데, 이들은 신흥부자와 달리 굳이 부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고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최고급 스타일로 입는다는 것이다. 올드머니 룩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안목과 취향에 대한 선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단순히 명품을 입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타고나는 것, 즉 유전적 요인의 영향이 큰 '키'도 육각형 기준에 포함된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키 1㎝가 연봉 몇천만 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는지 설문조사를 했을 정도로 키는 중요한 특성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요즘 부모들은 자녀가 작은 키를 갖지 않도록 어린 시절부터 관리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저신장으로 병원을 찾은 어린이가 2016년 대비 2021년, 5년 사이에 약 50% 증가했다고 한다. 아동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를 고려한다면 매우 빠른 증가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장호르몬 관련 질병이 늘어났다기보다는 자녀가 부족함 없는 키를 갖도록 성장호르몬 주사를 처방받고자 한 부모가 많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지나온 시간에도 적용된다. 

최근 아이돌 가수에 대한 팬들의 찬사에는 ‘학교폭력’ 문제가 없었거나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외모, 힘든 연습생 시절을 이겨 낸 강인한 멘털 등 과거의 이력도 포함된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육각형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조명이라는 점에서 20대 사이에선 학교생활기록부 인증 놀이가 유행하기도 했다. 최근엔 누구나 온라인으로 자신의 초·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는데, 이를 활용해 자신이 어릴 때부터 얼마나 성실했는지 혹은 한결같은 성격이었는지를 SNS에 인증하며 일종의 놀이처럼 즐기는 것이다.



성공과 완벽에 대한 압박은 강박적인 자기계발 열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올 상반기 해외 틱톡 사용자를 중심으로 ‘#luckygirlsyndrome’(럭키걸 신드롬)이라는 해시태그가 2억 회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를 반복적으로 외치면 정말로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 일종의 자기설득이다.


#Lucky girl Syndrome





 


왜 우리 사회는 육각형을 추구하게 됐을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보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SNS 창을 여는 순간, 우리는 의도와 상관없이 끝없는 비교 대상을 직면한다. 특히 SNS에서 볼 수 있는 타인의 모습은 이미 필터링을 거쳐 완벽한 모습 뿐이다. 

더욱이 '엄친아(엄마친구아들)'와 비교 당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 비교대상은 인종·연령·계층을 뛰어넘어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 


무엇이든 평가하게 만드는 시장환경 또한 육각형 인간 사회의 원인일지 모른다. 동네 음식점에서부터 제품과 서비스라면 무엇이든 별점을 매기고 리뷰를 남기는 습관은 수치화, 서열화하는 평가적 사고에 익숙하게 만든다. 


개인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특성이 육각형의 하나로 부각되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무언가 노력으로 일궈 낸 성과보다 타고난 것의 가치가 소위 ‘넘사벽’으로 차이가 벌어지면서 노력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팬데믹 기간 동안 ‘벼락거지’라는 말이 등장한 것처럼 자산 가치가 급등락하는 현상도 사람들로 하여금 노력의 가치는 운보다 못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볼 수 있다.




사실 ‘비교’는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사회적 비교란 SNS 시대에 처음 생겨난 게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강점·약점을 인지하고 사회규범을 사회화 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과잉 비교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과의 비교 대신,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나만의 육각형을 조금씩 채워 가는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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