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포르투갈 길은 프랑스 길에 이어서 순례자들이 두 번째로 많이 걷는 길이라고 한다. 포르투갈 길은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내륙길(616.4km)과 포르투부터 시작하는 해안길(256.9km)이 있고 두 길은 중간에 만나서 하나로 합쳐진다.
나는 내륙길 중 포르투갈과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스페인 마을 뚜이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18km를 6일 동안 걸을 예정이다.
작년에 순례길을 다녀왔는데 또 순례길에 가는 이유는 이 길의 단순함이 좋기 때문이다.
여행을 할 때면 가기 전에는 교통편부터 숙소, 이동 동선 등 자잘하게 준비할 일이 많고, 가서도 계속해서 지도를 보고 정보를 검색하게 되는데, 순례길에서는 출발 지점까지 교통편만 해결하면 해야 할 일이라고는 화살표를 따라 걷는 것밖에 없다!
첫 순례길 때는 배낭이며 신발 의복 등 장비를 알아보고 사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이번에는 다 갖추고 있으니 항공권 발권 빼고는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어둑어둑한 시간에 뚜이에 도착했다. 같은 스페인인데 집 나온지 14시간 반 만에 도착이라니.
힘든 하루를 보냈으니 푹 자고 다음날을 기운차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잘 자던 중 갑자기 방의 불이 켜졌다. 불빛에 잠이 깨서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3시. 건너편 침대를 쓰던 할아버지가 자기 화장실 간다고 방의 불을 켠 것이다.
아니, 침대 옆의 개인 전등은 장식품인가? 한 번 싹 달아난 잠은 쉬이 돌아오지 않고.... 그 와중에 할아버지 코 골고 잠꼬대하고 갑자기 아래층 침대에 있는 할머니한테 큰 소리로 말 걸기까지...
맞아 이게 알베르게였지 ㅠㅠ
Day 1.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
뚜이(Tui)에서 오 포리뇨(O Poriño)까지
18.1km
20km도 안 되는 길이라서 여유도 있고, 전날 늦게 도착한 탓에 뚜이를 제대로 못 둘러봐서 마을 구경 한 다음에 느긋하게 걸을 생각이다.
영국길에서는 침대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공립 알베르게 자리 차지한다고 7시부터 걷기 시작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거의 다 사립 알베르게로 미리 예약해 놓아서 굳이 빨리 안 걸어도 된다. 해도 8시 넘어서 뜨고 낮도 긴데 굳이 춥고 어두운 시간부터 걸을 필요 있을까? 해 뜨면 나가서 천천히 걷자.
뚜이 대성당 조가비 앞에서 본격적인 순례길 시작.
이제 노랜 화살표를 따라가 봅시다.
포르투갈 길에서는 확실히 순례자들이 더 많이 보인다. 스페인의 부활절 연휴 동안 나처럼 뚜이에서 시작한 스페인 순례자들도 많다.
한 무리의 순례자들 뒤에서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현지인 할머니가 말을 거신다.
“너는 혼자 걷고 있네. 저 앞사람들하고 다르게 천천히 걷는구나.”
아침 산책 중이라던 할머니는 한동안 나와 함께 걸으며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사진 찍느라고 잠시 멈춰서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다시 걷고 있는데 한참 앞에 가던 할머니가 자꾸만 내 쪽으로 돌아보신다.내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내 쪽으로 다가오신다.
산책 끝나셨나? 갸우뚱하고 있는 나를 향해 할머니는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걸 알려주려고 일부러 다시 돌아오신 거다.
잘못 든 길을 빠져나와 순례길로 향하는 도중에 할머니는 나처럼 길을 잘못 든 또 다른 순례자 한 명도 구제하셨고 셋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혼자 걷고 있는 여성 순례자가 지나가자 할머니께서 나를 툭툭 치시더니 “저기 너처럼 혼자 걷고 있는 애가 또 있네!’ 하며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할머니께서 혼자 걷는 여성 순례자를 자주 본 적이 없으셨던 건지 혼자 걷는 내가 마음이 쓰였나 보다.(실은 엄청 많은데!) 할머니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까지 앞장서서 건너 주시고는 오던 길을 돌아가 집으로 가셨다.
.한 5km쯤 걸었을 때 잠시 쉬고 화장실도 쓰려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한 후 다시 걷는 중 갈림길이 나왔다. 하나는 메인 길이고 하나는 우회 길이다. 우회 길은 메인 길보다 시간은 좀 더 오래 걸리지만 굳이 우회 길을 만들었다면 이유가 있겠지? 메인 길이 위험하거나 뭔가 문제가 있거나. 1km 더 걸어도 고민 없이 우회길로 들어섰다.
역시나 선택은 옳았다. 우회 길은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에 들어와서야 드디어 시야에서 사람들이 띄엄띄엄해졌다. 사람 말소리가 사라지고 새소리와 물소리만 가득했다. 숲 냄새를 맡으려고 크게 숨을 내쉬며 걸었다.
도착을 한 시간 정도 남겨놓고 카페테리아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당연히 비건 옵션은 없다. 스페인에는 보카디요 베헤탈(bocadillo vegetal)이라고 채소 샌드위치가 있는데 채소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햄 치즈가 기본으로 들어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채소 김밥에 채소만 있는 게 아닌 것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카페 주인에게 토마토, 상추, 양파 등 있는 채소로만 샌드위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보통 샌드위치에 따로 소스가 없기 때문에 잼이라도 발라달라고 했는데 정말...맛이 묘했다.
비건이 된다는 건 맛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니 맛없게 비건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을 정말 싫어하는데 뭐 어쩌겠나.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알아서 먹을 걸 미리 준비해서 싸왔어야 했는데. 그래도! 내가 덜 부지런해도 어디에서든 힘들지 않게 비건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구축되기를 바라는 본다.
포르투갈 길은 그래도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걷는 길이니까 비건 상황이 낫지 않을까 아주 약간의 기대를 해 보았으나 결론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아, 대체유 있는 카페는 좀 더 많더라.
길은 도롯가, 숲길, 마을, 숲길, 도롯가로 계속해서 바뀌고, 새소리와 물소리 들으며 보드라운 흙을 밟을 수 있는 숲길이 제일 좋다.
가랑비가 한참을 내려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판초 우비를 꺼내 입었는데 그때 우비 집을 두고 온 걸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깨달았다. 저번에도 모자, 선글라스, 브라탑 매일 야금야금 잃어버렸는데, 이번에도 벌써 시작...?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인 오포리뇨에 도착했다.
출발 시간 9:30
도착 시간 1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