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엘리 May 20. 2023

비와 레이

비가 오면 나타나는 손님

언제 머리와 수염을 매만졌을까 싶은 모습에 이미 삼십 년은 입은 것 같은 낡은 옷을 걸친 초라한 행색의 한 노인이 폭우를 뚫고 찾아왔다. 우리 동네는 갑자기 쏟아지는 많은 비와 만조 시간이 겹치면 타운을 드나드는 저지대의 도로가 통제되기 일쑤다. 낮이라면 몇 시간 기다려 운행이 재개될 때 빠져나가면 되지만, 문제는 밤이다. 가끔씩은 미처 예상치 못한 폭우와 만조 시간이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에 맞아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타운에서 목적지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우리 모텔 같은 타운 내의 모텔에서 하루를 머문다. 처음에는 그 노인도 폭우에 갈 길을 가지 못했구나 생각하고 방을 내주었다.


노인의 이름은 레이라고 했다. 레이는 비가 그치고 통행이 원활해졌는데도 우리 모텔에서 이틀을 더 머물고 체크 아웃을 했다. 짝꿍은 레이가 외롭게 혼자 지내는 가난한 독거노인이라고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초라한 행색이 한 몫했다. 산속 어딘가에서 혼자 지내는데, 사나운 날씨 때문에 전기도 통신도 원활하지 않아 잠깐 타운에 머무른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어지간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강강약약(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약하게)” 법칙을 따르는 편인 짝꿍은 떠나는 레이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날씨 때문에 하루 이틀 머물 곳이 필요하면, 돈이 부족해도 우리 모텔로 오세요. “

“하하하. 나 돈 많다우. 걱정 말게나. 다음에 또 봄세. “


레이는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하고 길을 나섰다.


얼마 후, 레이가 다시 찾아왔다. 물론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도로가 통제될 정도로 많이 비가 오지 않았고 밤이 아니라 환한 대낮이었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는 낡은 옷에 그 사이 3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이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깨진 후미등을 테이프로 칭칭 감고, 페인트가 벗겨져 곳곳이 녹슨 낡은 하얀색 세단을 타고 왔다. 이번에는 일단 이틀을 머물겠다고 했다. 구면이라고 묻지 않은 이야기를 몇 가지 들려준다.


“나는 마리나(보트나 요트 정박지)에 보트에서 산다네.  지난 큰 비에 보트에 물이 들어오고 배가 고장 나서 물 퍼내고 고치느라 한참 고생했는데 또 비가 오는군. 이번에는 별 일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말이야.

오늘은 메디컬 센터에 들러야 해서 배에서 나왔어. 병원 들러서 약국도 가야지. 나온 김에 옷도 한 벌 사야겠네. “




사실, 레이가 배에서 홀로 살고 있다는 것, 주로 비가 오면 타운으로 나온다는 것, 정기적으로 메디컬 센터에 간다는 것 외에 레이에 대해 아는 바는 많지 않다. 그를 돌봐줄 만한 가족이 있는지 또는 그의 직업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른다. 대신 그가 던지는 몇 마디 말과 그가 머물 때 그의 방에서 보는 그의 물건, 그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방의 흔적을 통해 그의 과거의 삶을 마음대로 추정해 보는 것이 전부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아저씨들 사이의 인기 프로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하는 산에 살고 있는 사연 많은 자연인들처럼 배에 살고 있는 뉴질랜드판 자연인인 그의 과거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이다.


 레이가 머무는 방에 쓰레기를 버려주고 수건과 그릇을 깨끗한 것으로 갈아주러 들어가서 살펴본다. 그가 말했던 대로 돈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최신형 아이패드랑 스피커를 연결해서 뉴스를 보고 듣게 연결해 놓았고 그 밖에도 각종 전자 기기들이 눈에 띈다. 시사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지 환경이나 국제 정세와 같은 주제를 이야깃거리로 삼기도 한다. 책이라고는 들여다볼 것 같지 않은 외모이지만 신문과 책이 탁자 위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한 때 그가 복잡한 도시에서 큰 사업을 하던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었을까? 배에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고급 요트를 수십 척 가지고 있는 부유한 선박업자는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족과 연을 끊고 지금은 작은 보트에서 살면서 낚시로 시간을 보내는 걸까?


이렇게 생각이 미치다가도 레이가 머물렀던 방에 그가 체크아웃을 하고 청소를 하다 보면 그가 한 때 성공한 사업가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싹 사라진다. 방이 정말 지저분하고 어디 하나 정돈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선입견 같은 것이지만 이렇게 어질러진 방을 보면 그 사람의 삶에 한 때라도 성공은 없었을 것만 같다. 샤워실에는 비누 거품을 비롯한 사람이 씻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세면대에는 면도한 털이 수북하다. 게다가 냉장고에는 우유나 버터를 꼭 흘려놓는다. 먹을 때는 맛있을지 몰라도 둘 다 마르면 냄새가 고약하고 찐득한 편이라 청소에는 품이 든다. 그릇과 차가 놓여있는 선반 주변에도 설탕이나 소금이 쏟아져 있는 경우도 많고 잼이나 끈적한 것이 주변 어딘가에 십중팔구는 묻어있다. 식탁이나 침대 주변에는 빵이나 비스킷 부스러기가 이쪽저쪽 산발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불과 침구도 당연지사 세탁이 필수다. 다른 방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그의 흔적을 지우고 나면 그는 평생 집이 아닌 배에서 생활한 뱃사람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젊은 시절에는 원양어선을 타며 재산은 어느 정도 모았지만 배 타느라 가정을 이루지 못했거나 가정을 돌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 이쪽저쪽 떠돌며 살았을까?


비바람이 몹시 부는 오늘도 레이가 우리 모텔에 머물고 있다. 주말인데도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빈 객실이 많은 오늘 밤인데, 날씨 때문에 레이는 우리 모텔에 머물고 있다. 이번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지 며칠 째 메디컬 센터를 왔다 갔다 한다. 레이는 언제까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혼자 살 수 있을까? 땅 위에 발 붙이고 사는 우리의 삶도 때로는 망망대해에 홀로 표류하는 외로운 배처럼 느껴지듯이 레이는 배 위에서 홀로 지내는 삶이 결국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창밖에 거센 비바람 소리가 들려오니 괜스레 싱숭생숭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만나서 반가웠습니다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