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서 생각해 보면 나는 남미새였던 것 같다. 누군가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 마음의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고 연인 간의 관계는 친구와의 관계 이상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연인이 없던 기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와 만나는 기간에는 최대한 그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곤 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내 남자친구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 굉장히 화를 냈던 경험도 있고,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나 남자친구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건 돈을 쓰면서 친구들에겐 돈 없다고 만나기 힘들다고 했던 적도 많았다.
어느 날 S는 내게 이것과 관련해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만나자고 하면 돈 없다고 하고, 여행 가자는 것도 돈 없다고 하고, 항상 그렇게 없다면서 네 남자친구랑은 꾸준히 만나고 있지 않냐고. 우리가 네 남자친구보다 못한 것 같다며 기분 나쁘다고.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꽤나 돈에 예민한 상태인 게 사실이었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생활비를 모두 혼자 충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예민한 부분에 예외를 둔 게 남자친구였으니 내 예민함을 다 받아준 친구들 입장에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고치겠다고 이야기를 끝내고 그 뒤엔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서로 매일 카톡 하던 단톡방도 점점 조용한 나날이 많아지던 때에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현재의 남자친구와 심각하게 싸우고 헤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아슬아슬했던 상황이 있었다. 나는 S에게 전화해 계속 울면서 내 기억과 경험과 감정을 뱉어냈다. S는 몇 시간이나 나를 달래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괜찮다. 더 좋은 사람 만날 거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자친구와 화해하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실 온전히 내 잘못으로 헤어지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내 감정을 다 받아준 친구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머쓱해하며 S에게 남자친구와 다시 만난다고 전했다.
그러고 며칠 뒤, 원래 S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으나 미안한데 못 만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바쁘겠거니 싶어 알겠다고 답을 했다. 또 며칠이 지나 언제쯤 만나냐고 장난스레 카톡을 보냈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답이 왔다. 그제야 나는 당황하게 된다. 왜냐고 물었지만 딱히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알겠다고 하고 남은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된 날짜에 다시 연락을 했다. 다시는 나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식의 답변을 받았다. 시간을 주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끝나버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애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우리 잘 지냈지 않았냐고, 10년 가까운 지난 시간이 생각나지 않냐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다. 그 애의 죄책감을 어떻게든 노려보려고 한 짓이다. 당시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게 끝을 고하는 그 애의 감정이, 결단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야 얼추 추측하는 바다. 그런데 나는 끝까지 내가 잘하겠다는 말이나 해댔다.
시간이 흐르며 내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는 때도, 합리화하는 때도, 그냥 다 놓아버리는 때도 존재했다. S가 안다면 징그럽겠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가끔 S와 화해하는 꿈을 꾼다. 언젠가는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때도 있지만 그건 내 욕심이란 걸 오래전에 깨달았다. 이제는 잘못을 받아들이고 그 애의 선택을 존중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행한 모든 잘못을 알 수는 없겠지만. 이제 그냥 나라는 사람과 나빴던 기억은 뒤로하고 S의 앞날에 좋은 일과 좋은 사람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내 글을 본다면, 끝까지 징그럽게 네 이야기를 글로 써서 미안. 그래도 네 덕에 내가 정말 이기적이란 걸 잘 알았어. 소중할수록 소중하게 대했어야 한다는 것도, 싫다는 걸 싫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알았어. 나 같은 사람을 두고 끝내자고 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런 선택을 지게 해서 미안해. 상처 줬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사과할게. 언제나 잘 지내길 바라고 있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