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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적어라, 독서노트는 필요 없다

책은 저자와 내가 함께 쓰는 '노트'

by 이진선



"또? 으이그, 지겹다 지겨워."

"왜~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데. 책은 소중하잖아."

"누가 말리겠어. 나중에 내 것도 좀 해줘~"


동료 J가 말했다. 신입사원 시절이다. 나는 점심시간에 투명한 비닐로 책 표지를 싸고 있었다. 당시에는 종종 회사로 책을 주문했다. 취업을 하고 내가 번 돈으로 원하는 만큼 책을 사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기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새 책을 한 권 한 권 비닐로 싸는 작업이 읽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신성한 의식이었다. 항상 새 것처럼 유지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신경을 썼으니 감히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책은 깨끗하게 읽어야 할까,
더럽게 읽어야 할까?


문제는 책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덮어버리는 순간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책을 펼치면 처음 읽는 것처럼 전체를 다시 살펴야 했다.


'어디가 재밌었더라? 여기였나?'

'아... 꼭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는데 뭐였지?'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며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을 찾으려다가 금세 귀찮아져서 포기하고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하루는 큰 마음을 먹고 중요한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봤다. 책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중요한 부분인지 정확히 표시하는 게 어려웠다. 읽고 싶은 책은 점점 늘어나는데 밑줄을 긋지 않겠다고 굳이 포스트잇 한 통을 다 쓴다는 사실이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내 돈으로 내가 산 책인데. 읽으려고 산 거잖아!’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속을 뒤적거리다가 형광펜을 집어 들었다. 주욱-주욱-주욱- 책 위에 줄을 긋기 시작했다. 깔끔 강박과 이별한 순간이다.


깨끗하게 읽을지 더럽게 읽을지는 책을 대하는 관점이 명확해지면 자연히 해결되는 문제다. 단지 재미로 읽으려고 샀거나 디자인이 예뻐서 소장용으로 산 책에 구태여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다. 취미로 하는 독서는 예쁘게 모셔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전문가는 목적이 있는 독서를 한다. 내 필요에 의해 책을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책 속에 뛰어든다. 신하가 아닌 주인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며 책의 신성함에 주눅 들지 않는다. 우리는 취미 독서와 목적 독서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종이는 어차피 낡고 삭는다. 누렇게 변색되고 바스러진다. 죄의식을 버리고 마음 편하게 더럽히며 나만의 책을 만들어 가자.


형광펜의 등장
나도 취미 독서를 한다. 소장하고 싶어서 산 디자인 원서, 동화책, 생명 과학 서적




독서 노트를 따로 만들어야 할까?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별명은 '빽빽이'였다. 매일 2~3장씩 공책 양면을 영단어로 빽빽하게 채우는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쓰기를 위한 쓰기였다. 아이들은 날마다 하얀 종이를 가득 채우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기에 바빴다. 한 학기 내내 반 평균은 그대로였는데, 화가 난 담임 선생님은 이럴 바엔 빽빽이를 그만두라고 하셨다. 노트의 족쇄에서 벗어난 이후 치른 첫 시험에서 반 평균 성적이 올랐던 일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독서 노트를 만드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다만 긍정적인 효과만큼이나 투자 비용이 많이 든다. 별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책의 핵심을 정리하는 것은 극소수만 성공하는 강도 높은 독서법이다.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정리해 놓으려는 완벽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열렬하게 독서 노트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직업(독서 코치, 작가)인 경우가 많다. 뒤집어 말하면, 독서를 직업으로 삼지 않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


나는 지나친 거창함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밥 먹듯이 숨 쉬듯이 매일 할 수 있는 쉽고 편한 독서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독서가 의무가 되는 순간 우리는 책의 주인이 아닌 신하로 강등된다. 많이 읽거나, 빨리 읽거나, 엄청 빽빽하게 정리하거나, 그게 무엇이든 형식에 매달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문가는 형식주의가 아닌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독서가 노동이어서는 안 된다. 의무감으로 읽어서도 안 된다.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 사고력이 목표다
기억은 아웃 소싱한다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외우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피로를 느낀다. 강제로 무언가를 암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집중력이 저 멀리 도망간다. 책을 읽을 때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적극적으로 잊어버린다. 대신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 사고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글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을 파악하고, 연관 키워드를 떠올리고, 새로운 용어를 배우는 과정은 업무에서 문서를 읽고, 상황을 읽고, 맥락과 패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기억은 아웃 소싱한다. 제2의 뇌라고 할 수 있는 나만의 서재에 책들을 풀어놓고 필요할 때 호출하는 방식이다. 전에 <3색 볼펜으로 거침없이 더럽혀라>에서 말한 것처럼 책을 종이로 만드는 이유는 더럽히기 위해서다. 그리고 책을 더럽히며 읽는 이유는 책과 나 사이에 약한 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흔적 남기기는 일종의 스위치를 달아 놓는 것과 같다. 각각의 책은 의식의 일부가 되고, 밑줄과 메모를 다시 보는 것(스위치 ON)으로 무의식 안에 숨어있는 기억을 소환한다. 밑줄과 메모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작지만 중요한 습관이다.


제2의 뇌 서재는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다




책은 저자와 내가 함께 쓰는 노트


겉모습은 사진으로 기록한다. 내면도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록할 수 있을까? 책에 남긴 밑줄과 메모가 바로 그 역할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 관심사와 사고 수준이 변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요한 부분에 왜 표시를 안 해뒀지?’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때는 몰랐구나!'


책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책은 저자와 내가 함께 쓰는 '노트'다. 저자가 먼저 자신의 생각을 적고, 그 위에 내 생각을 더하면 책은 비로소 완성된다. 일방적으로 청취할 것인지 아니면 쌍방 소통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저자와 대화하자. 저자와 함께 노트를 쓰자.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즉각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을 고민 없이 적는다. 메모는 부담 없이 한다. 방식은 이렇다.


1. 따라 쓴다.

좋은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쓴다.
문장의 주어를 나로 바꿔 쓴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여백에 적는다.


2.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표시한다.

밑줄을 긋고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적는다. 책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과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섞여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행위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면서 읽는 것이다. 독자의 의도, 태도, 관점에 따라 똑같은 책이 인생 책이 되기도 하고 뻔한 책이 되기도 한다.


3. 면지에 생각을 기록한다.

읽은 날짜, 책을 읽게 된 동기, 기대하는 점, 목적을 적는다. 일기를 써도 좋다. 사실 무엇을 쓰든 상관없다. '이 책을 읽던 시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4. 의미 파악이 안 되는 단어에 표시한다.

의미 파악이 안 되는 유형은 2가지다. 원래 모르는 단어인 경우와 아는 단어를 저자가 새롭게 정의하는 경우. 원래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고 뜻을 적는다. 그렇다고 모르는 걸 모두 찾아서 적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만 한다. 저자가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는 경우라면 이해가 안 되는 이유를 적는다. 그 단어가 등장한 이후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지 기다리면서 읽는다.


5. 정말 중요한 내용은 맨 끝에 요약한다.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짧게 적는다. 간단한 다이어그램을 그려도 좋다.


6. 책의 내용과 상관없어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적는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순간에만 떠오르는 찰나의 생각들이 있다. 종이에 붙잡아 두자. 읽고 있는 책과 연관된 다른 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것도 적는다.


7. 강렬하게 표시하고 싶은데 3색 볼펜으로는 아쉽다면.

그럴 때 나는 형광펜 '모나미 에센티 스틱 브라이트'를 이용한다. 일반 형광펜과 달리 고체형이라서 시간이 지나도 휘발되지 않고 종이 뒷면에 비치지 않아 좋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이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면 안 된다.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도 하지 말자. 사람마다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고, 다른 생각을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읽고 받아들일지를 자신의 페이스에 맞게 조정해 나가야 한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1년, 5년, 10년의 세월 동안 지속한다면 축적의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지금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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