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이지만 한때 <리더십과 치료>라는 주제로 여러분을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지금 다시 절박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서울대 의대 신찬수 학장의 이름으로 게시된 “의과대학생 동맹휴학 및 의사국가고시 거부에 대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입장”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https://mdon.co.kr/news/article.html?no=29195
내용은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정책은 장기적인 보건의료발전계획 차원에서 신중하고 면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휴학계를 제출했고 졸업반 학생들은 의사국가고시 실기시험을 철회하고 있어 스승으로서 참담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스승인 교수들이 나설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내가 오래전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아래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s://mindprogram.tistory.com/340
https://mindprogram.tistory.com/179
https://mindprogram.tistory.com/180
나 역시 참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리더십과 치료가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면서 야스퍼스, 가다머,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세계를 사례로 들었습니다. 이 모든 세계가 인간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므로 철학이 없는 리더십과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지 않는 치료행위는 오히려 인류문명을 퇴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내 강의를 들은 후, 나를 초대했던 교수들 몇몇이 함께 식사를 했었습니다. 그분들이 지금도 근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의료계에 문외한인 나에게 하는 얘기의 논점은 이랬습니다. 미국의 유명 의대와 병원의 사례를 들면서 우리 의사들도 의술에 관한 한 미국 못지않게 따라왔는데, 재정이나 의료장비, 부족한 의료수가, 비인기전공과 의료인 수급불균형 등이 큰 문제라며 미국 사례를 반복하더니 결국은 돈 얘기로 귀결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당시의 문제의식이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여러분이 제자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썼다는 입장문에서, 교수로서 제자들의 영혼을 울리는 어떤 리더십도, 의사로서 어떤 철학적 사유나 분별력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독재시대를 겨우 건너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독재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누구라도 반기를 들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분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오늘날 그렇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서울대 의대, 법대, 상대 교수들이 당시에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습관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아주 최근의 일로 보자면, 백선하 교수는 백남기 농민의 사망원인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속일 수 없으며, 역사의 죄인일 뿐입니다. 설사 내가 그 당시 살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습니다. 과거 조상들이 남긴 죄과가 우리에게 그대로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독재정부가 아니라 촛불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이 뽑은 민주정부입니다. 현 정부는 과거 독재자들이 남긴 죄과를 그대로 짊어진 채 민주주의 방식으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으로 설계된 법률체계에 따라 국정을 개혁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 역시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짜증도 납니다. 내가 보더라도 형편없는 장관들이 수두룩합니다만,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관들 중에도 과거의 습관이 남아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독재시대 같았으면 청와대로 불러들여 쪼인트 몇 대 까였을 고위공직자들이 누군지도 시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공권력의 강제적 행사를 억제하면서 고위공직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정부라면. 서울대 의대 학장이 이런 입장문을 발표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제자들을 선동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쓴 입장문은 역사의식이 결여된 조잡하고 비겁한 내용입니다.
독재시대를 거쳐 온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의사들만 존엄한 인간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분들도 존엄한 인간입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을 뿐 그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가 그들을 돌보아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어야 함에도,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우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누릴 권리를 제공해야 마땅합니다. 이미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사회는 지금 위헌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식인들이 이 상황의 엄중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노숙자들을 직접 돌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의대 교수들의 역할이란 뭡니까?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연구와 진료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의사로서 교수의 본분은 제자들이 장래에 훌륭한 의사가 되도록 잘 가르치는 겁니다.
다 같은 의사들이 의사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때로는 장려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이익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인류문명이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이익추구 행위가 누군가의 손실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도적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혁신은 언제나 자율성으로부터 발아됩니다. 인간의 존엄성도 개인적 자율성에 기반합니다. 그러므로 의사들도 자율성에 기초하여 혁신을 일으켜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플러스썸(plus sum)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류는 이 플러스썸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과정에 있는 제자들의 휴학과 집단 국시 철회 등과 같은 행태에 직면했을 때,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은 인간 존엄성의 근간이 되는 자율성, 즉 자기책임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가장 많이 배우는 단계에 있는 제자들이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태도를 길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잘했다. 너희들은 각자 자기이익을 위해 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준비를 해라. 정부의 행정명령을 자유의사로 거부한 것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어떤 보호막이 되어 줄 수 없다,”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제자들은 플러썸을 만들어내는 의사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쓴 “혹시라도 의과대학생들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스승인 우리 교수들이 나설 것입니다. 정당한 주장을 하는 제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병원에서 진료를 하는 것이나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라는 언명은 조폭 보스들이 중간 보스나 새끼 조폭들에게 하는 말과 아주 유사합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의 집단행동이 불합리한 의료정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순수한 열정의 산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말입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찍소리도 안 하고 있다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쓴 입장문은 인간의 존엄성이 결여된 조잡하고 비겁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국민 전체의 애끓는 입장을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제자들을 아끼는 심정을 명분으로 삼고 있으나, 여러분이 쓴 입장문은 의사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 지금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일본인들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군대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힘을 합쳐 적군과 대결해야 합니다. 적군과의 싸움에서 어떤 부대가 자기부대의 내무반 시설이 엉성하다고 총기를 버리고 시위에 나섰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병사들 침낭이 부실하다고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평소에 할 일이 있고, 전시에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져 온 국민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도시와 마을이 봉쇄당해야 할 위기에 닥쳐있습니다. 이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 교수들이 지금 제자들을 선동하는 입장문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휘관의 지휘도 따르지 않는 망나니들 때문에 매일 수백 명씩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병원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마당에 여러분은 정부의 의료정책을 반대하면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쓴 입장문은 분별력이 결여된 조잡하고 비겁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