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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Apr 01. 2016

밑 빠진 사회

제4차 산업혁명(Industry 4.0)이 인사조직에 끼치는 영향(1)

밑 빠진 사회     

제4차 산업혁명(Industry 4.0)이 인사조직에 끼치는 영향(1)



기업체에 초청을 받아 강의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은 수단이나 도구를 자신들의 손에 쥐어 주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이세돌 9단을 이길 수 있는 알파고 같은 요술방망이를 요구한다.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조직의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그런 변화를 실행할 수 있는 바탕이 튼튼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달라는 것은 아주 멍청한 요구다. 나는 귀신이 아니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기대가 생겨나는 걸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했다. 공화주의도 마찬가지다. 헌법에 있는 민주공화국의 이념은 우리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이것의 뿌리는 그리스와 로마에 있다. 서양인들이 발전시켜 온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이 어느 날 느닷없이 우리에게 들어왔을 뿐이다. 민주공화국이 되려면 개인들 간의 철저한 계약관계에 의해 사회가 움직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당사자간의 계약정신이 거의 없었다. 국가라는 것이 시민들 간에 계약으로 맺어진 개념적 실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보다 힘 센 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고 말았다. 어느 사회학자의 표현대로 "지배받는 지배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외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유학생으로서 철저히 '지배받는 자'로 살다가 귀국하면 자신보다 덜 배운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참조)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배운 이론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또는 자신의 이론이 왜 적용되지 않는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식을 뽐내며 지배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때로는 저명한 외국의 스승들을 끌어들여 심포지엄을 열고 그들을 칭송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비극이다. 서양에서 개발된 이론은, 그 사회에는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 현실에는 대부분 적용 가능하지 않다. 이제 그 얘기를 잠시 하려고 한다.     


현실은 인간의 두뇌에서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세계다. 그런 현실을 인식하려면 두뇌에다 가상의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 모형을 현실에 투사해야만 현실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모형들이 모여 이론을 형성한다. 그런 이론을 만들어 주는 것을 기본 모형이라고 한다. 내가 주로 쓰는 기본 모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인식하고자 할 때 몇 개의 층위로 나누어서 개념들을 만든다. 특히 사회현상을 이해·설명·예측할 때는 이런 층위로 나누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학자마다 다른 용어를 쓰지만 대개 비슷하다. MIT의 조직심리학자 에드거 샤인(Edgar Schein, 1928~)은 집단의 문화를 이해할 때도 세 가지 방식으로 연구한다고 했다. 첫째는 물리적인 공간, 구성원의 행동 등과 같은 '인공물'(artefact)을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는 구성원의 '가치관'(value-orientation)을 조사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된 '기본 가정'(basic assumption)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세 가지 층위를 매크로(macro), 메조(meso), 마이크로(micro) 레벨로 나누어 설명한다. 어떤 유형의 조직에도 쓸 수 있는 범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인식의 층위를 매크로 레벨이라고 한다. ‘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또는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의사결정을 ‘왜’ 해야 하는가? 어떤 조직 또는 직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이렇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층위다.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이 매크로 레벨(‘왜’ 수준)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왜’ 질문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냥 그렇게 해왔고 남들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왜’를 질문하면 또라이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잘못하면 그 조직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2016년 3월에 벌어진 거대 정당들의 20대 총선 공천과정은 한 마디로 코미디였다.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당헌 당규에도 어긋나는 행태였다. 그럼에도 당내에서는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만 있었을 뿐, 그 불합리한 판을 뒤집을 만큼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저항하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는 합리적인 질문에 정당 지도층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정무적 판단’이었다는 황당무계한 답변만 들었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갔다. 그냥 그렇게 할 테니 그렇게들 알고 있으라는 명령만 존재했다.     


다음 기사를 보자.     

“한 달 사이에 5명의 20대 파견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다 메틸알코올에 중독돼 실명 위기에 빠진 사건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충격적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하청업체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안전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루는 물질이 무엇인지, 얼마나 독성이 있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았고, 심지어 독성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에게 보안경, 보호장갑, 방진마스크 등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위험을 외주화'한 원청은 하청 노동자들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삼성전자 하청업체 20대 파견노동자 잇단 실명위기, 왜?(민중의 소리, 2016-02-26)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법규와 절차를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일상적인 인재(人災)가 대부분이다. 이런 재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근본 원인을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업주는 사고가 나면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삼성, 엘지, 현대와 같은 재벌 원청회사들은 하청회사들의 건강한 작업환경 여부를 왜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을까? 하청업체들이 저런 환경에서 일하면 원청회사들에겐 어떤 이득이 돌아올까? 노동부 근로감독관은 왜 위험사업장에 대해 철저히 감독하지 않았을까? 이들의 답변은 답변이 아니라 변명에 불과하다. 답변에 대해 ‘왜’를 대략 세 번에서 다섯 번쯤 캐고 들어가면 그 답이 나온다.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살기 위해서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왜’에 대해서는 책임 있는 자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제대로 답변하지 않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책임 있는 자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살아야 하고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예를 보자. 기업에서 매년에 한두 차례 직원 평가를 한다. 상사가 부하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를 창출했는지를 평가하여 그 결과를 성과급뿐만 아니라 인사 전반에 활용한다. 내가 자문했던 어느 기업의 인사담당자와의 대화 내용을 축약해서 살펴보자. 실제 사례다.     


(질문) 회사에서 왜 직원 평가를 하는가?

(대답)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구별해서 그 결과에 따라 공정한 보상을 해야 잘하는 사람에게는 동기부여가 된다. 못하는 사람도 더 잘하기 위해 분발할 테고. 그래야 회사가 발전하는 것 아닌가?

(질문) 직원들이 과연 평가가 공정하다고 느끼는가? 성과급 배분도 공정하다고 느끼는가?

(대답)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가방법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질문) 지금까지 여러 평가방법을 써봤을 것이고 수없이 수정 보완을 해왔을 텐데, 아직도 완벽한 방법이 없다면 언제 평가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을까?

(대답)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가를 생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질문) 그렇다면 평가 후의 상황을 보자. 평가 시즌이 끝나고 나면 업무동기가 왕성해지고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활력이 직원들에게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이는가?

(대답)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직원은 그렇다.

(질문) 바로 그것이다. 일부 직원만 그렇다면, 대다수 직원들은 평가가 끝나면 시무룩해진다. 대부분은 업무 의욕을 잃는다. 입이 주먹만큼 나오고, 속으로는 ‘시발 시발’하고 있을 것이다. 이 회사를 더 다녀야 하나, 이직을 위해 헤드헌터를 찾아야 하나,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나,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생긴다. 처음에 회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평가를 한다고 했는데, 평가가 과연 회사를 발전시키고 있는가?    

 

대화를 더 이어갔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평가 때문에 직원들의 의욕이 꺾인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가의 근본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왜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목적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직원 평가의 근본목적이 확고히 정립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왜 평가를 해야 하는지 명확하기 때문에 기존의 평가방법을 대체하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다른 회사에서 어떻게 하는지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벤치마킹이 소용없는 짓이 된다. 매크로 레벨이 아주 튼튼하게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다음 단계로 맘껏 뛰어오를 수 있다. 매크로 레벨은 기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고 기존의 습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안타깝게도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이렇게 창조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기존의 평가방법을 개선하려고 애를 쓰면서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서로 베낀다. 다들 평가항목과 그 비중을 마이크로 레벨에서 조정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매크로 레벨이란 조직운영의 플랫폼을 말한다


매크로 레벨이란 구성원들이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정신적 경제적 토대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조직운영의 플랫폼(platform)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운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왜’를 묻는 매크로 레벨이 사라졌다. 사회와 조직을 운영하는 플랫폼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학교에서조차 이 세계와 현상에 대한 근본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해야 방법과 그 이유를 배우지 못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그저 정답을 외우고 시험성적을 높이는 것에만 몰입한다. 이들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며, 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모두들 승리의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명령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에 익숙해 있다. 반론을 거의 제기하지도 않는다. 만약 다른 의견을 말하면, 배신자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마땅히 서로 토론해 보아야 한다. 토론을 통해 더 좋은 창조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란 없다. 다른 의견이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것이고 용서할 수 없는 사태다.      


심지어 명령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심지어 언론에서도 그렇게 평가한다. 조직에 질서를 잡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의 대표가 되어 소속 국회의원들을 윽박지르며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켰다. 그는 공천권을 무기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찍소리도 못하게 했다. 질서가 잡히는 듯하자 언론에서는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나왔다.     


나폴레옹 전쟁


19세기 초엽 프로이센의 군대가 그랬다. 엄격한 군기로 조직이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고 있어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누구나 프리드리히 대제의 군대에 대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1806년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큰 전쟁을 벌였다.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에 충성하는 군대는 질서가 잡혀 있었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였다. 적군보다도 상관을 더 무서워할 정도로 군기가 잡혀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예나(Jena)와 아우어슈테트(Auerstedt) 전투에서 오합지졸 같던 나폴레옹 군대와 맞붙은 프로이센 군대는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프로이센 땅에서 벌어진 전투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당시 프로이센의 젊은 황태자 아우구스트(August) 장군과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 저 유명한 『전쟁론』을 쓴 저자)가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었다. 이렇게 되자 거의 천 년을 이어온 독일어권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되고 말았다.      


승리가 우리의 운명이 아닌 것처럼 패배도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패배하는 것은 승리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가 ‘왜’의 매크로 레벨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은 채, 집을 지었기 때문에 약한 비바람에도 쓰러지고 패배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매크로 레벨에 집중하여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      


기초를 튼튼히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앞으로 지속적으로 생각하면서 이곳에 연재하려고 한다.     


자, 이제 ‘왜’에서 ‘어떻게’의 수준으로 넘어가 보자. 매크로 레벨에 집중하여 ‘왜’를 분명히 밝히고 구성원들이 서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여 받아들였다면, ‘어떻게’에 해당하는 방법론은 비교적 쉽게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부산에 간다고 했을 때, 왜 부산에 가야 하는지가 결정되었다면 부산에 가는 방법은 쉽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가 어렵지 ‘어떻게’는 비교적 쉽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거니와 ‘왜’에 집중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논란이 많고 가장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왜’의 단계를 피한다. 왜 부산에 가야 하는지, 어떤 목적 때문에 부산으로 가야 하는지, 어째서 평양이 아니고 부산인지, 무엇을 위해 광주가 아니고 부산인지 명확해야 한다. 이 ‘왜’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을 피하지 말고, 명석·판명한(clear and distinct) 답변을 얻을 때까지 그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    

  

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는지, 왜 독성이 강한 메틸알코올을 보호장비도 없이 사용하게 했는지, 인사담당 직원은 왜 직원 평가제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지, 안철수는 왜 야당끼리 서로 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지, 김종인이 말하는 정무적 판단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들의 깊은 속마음이 드러나 진실한 답변이 나올 때까지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깊은 속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가치관의 뿌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매크로 레벨이다. 이것이 뚜렷해지지 않은 채 진행되는 모든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매크로 레벨이 에드가 샤인이 말했던 기본 가정이기도 하다. 그들이 추구하고 원하는 가치의 근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한 채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우리는 어떤 직무의 존재 목적과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의 에너지를 그 직무수행의 ‘방법론’에 집중한다. 사태가 벌어졌으니 ‘어떻게’를 먼저 생각한다. 사태의 근원과 바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다른 사람, 다른 조직,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열심히 조사하고 비교해본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대부분 이렇다. 공무원들도 주로 이렇게 일한다. 정부가 발표하는 보도자료를 보면 대부분 ‘어떻게’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 미국, 중국, 독일 등 다른 나라의 사례를 조사하여 비교한 후, 우리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여러 가지를 비교해놓고 자신이 추구해왔던 가치(사적 효용의 최대화)를 위해 가장 유리한 것을 고른다.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와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    

  

정치권은 예로 들기에도 창피한 수준이다. 2016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20대 총선을 위해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들은 자신이 미는 비례대표 후보들을 상위 순번에 슬쩍슬쩍 끼워 넣었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비상대책위원이라는 직무의 존재 목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서슴없이 양아치 같은 짓을 저지른다. 지금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재빠르게 챙겨두는 것이 그들의 처세술이다. 이 처세술이 조직운영의 플랫폼을 붕괴시킨 것이다. 이런 짓이 중앙위원회에서 발각되어 결국은 비례대표의 순번을 뒤집었다. 누가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테지만, 그냥 넘어갈 것이 뻔하다.     


박근혜, 김무성, 이한구 등의 주요 당직자들이 벌이는 새누리당의 공천 코미디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대화와 토론을 위한 ‘왜’(공천관리위원회의 존재 목적)에 관한 질문은 없고 배신과 아첨, 위세와 허세, 음모와 모욕주기, 텃세와 패싸움만 난무했다. 도저히 정당이라고 볼 수 없으며 조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헌 당규는 그렇게 하자고 자신들이 스스로 정한 약속인데, 이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 누가 힘을 가졌느냐가 중요하다. 힘 있는 사람의 의도가 곧 당헌 당규다. 정당들 간에 벌어지는 정쟁과 정당 내에서 벌어지는 활극을 보면 조선시대의 당파싸움도 이랬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물질문명으로는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정신상태는 조선시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는 ‘왜’의 매크로 레벨(사회적 플랫폼)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왜'가 사라진 사회가 되었다. 밑창이 빠진 사회라고나 할까. 아무리 물을 부어도 고이지 않는 밑 빠진 사회다.     


어찌어찌해서 방법론이 정해지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수단과 도구들을 만들어낸다. 구입하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일은 아주 쉽다. 여기에는 어떤 창조적 사고와 행위도 나오지 않는다. 단순한 도구와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창조와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근본 원인은 매크로 레벨을 무시하고 메조 레벨과 마이크로 레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와 혁신은 매크로 레벨의 ‘왜’에서 시작된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는 왜 창조와 혁신을 못하는가? 참조할 것)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프로이센에서는 큰 변화가 일었다. ‘왜’ 패배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이 일었다. 그들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에 집착하지 않았고, 패배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했다. 그 원인들을 하나씩 고쳐나가면서 장기적으로 부강해지는 사회운영의 플랫폼(매크로 레벨)을 정립해 나갔다. 제4차 산업혁명의 초입에 있는 이 시대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다음 글에서는 이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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