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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May 13. 2016

딸과 아들에게 주는 유언의 글

언젠가는 자식들에게 해야 할 말

딸과 아들에게 주는 유언의 글


페북에 쓴 인트로

최근 자식들에게 줄 유언장을 쓸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진실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바뀌면 그 때 가서 다시 고치면 될 것이다. 내 자식들은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후기)
자식들에게 주는 유언의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꽤 오래전이었습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현 서울시장)가 "희망을 심다"(인터뷰어 지승호와의 공저, 알마 2009)라는 책을 내면서 말미에 '내 딸과 아들에게', '내 아내에게', '모든 가족과 지인들에게'라는 공개 유언장을 실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감동이 컸고 혼자서 유언장 비슷하게 써놓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은퇴한 후, 삶에 어떤 변화와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늦기 전에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가난을, 어머니로부터 기독교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이제는 그 유산을 완전히 극복했다. 이것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났고 기독교가 오늘날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불철주야 주경야독으로 공부하고 일하느라 고생하면서 세상을 이해했다.

      

너희도 잘 알다시피, 엄마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잠시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분가했다. 함께 살았던 기간은 1년도 채 안 될 만큼 아주 짧았다. 시골에 살던 부모님의 성격과 마음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온화한 아버지에 불같은 어머니. 이런 조합은 조화로울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진 않았다. 아버지는 이북에서는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유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의 부조화 때문에 이산가족으로 일생동안 고통받았다. 불같은 성품의 어머니는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모든 제사와 미신을 섬기는 온갖 불합리한 관행을 일거에 폐지시킨 여장부였다. 

     

우리가 독일 유학 중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급히 귀국하여 장례를 치른 후에야 아버지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죽음을 내다보셨는지 경주 최씨 가문의 몇 대 손이라는 족보책을 완성하여 남기셨다. 평안도 의주에 있는 선산의 묘소들까지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자식들에게 집안의 뿌리라도 남겨주고 싶은 최후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를 마치면서 서울살이도 끝냈다. 시골로 다시 내려간 어머니를 우리는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가 시골로 어머니를 찾아뵌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 손을 흔들다가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때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은퇴하고 나니 자식들 생각이 예전 같지 않다. 자식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부모의 기대와 설렘, 나아가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을 넣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주면서 자랑한다는데, 나도 그렇게 될까 겁난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은행원이 되었을 때,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내가 더 큰 집으로 이사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아주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좁디좁은 시골 동네를 수없이 자랑하면서 다니셨다고 한다.

      

30~40년 전만 해도 아내들은, 남편이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를 소망했다.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주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였고 평생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지 못했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는 크면 신사가 돼라’고. 젠틀맨 같은 영국 신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신사란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는 사람이었다. 남편에게서 기대할 수 없던 꿈을 아들이 이루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느냐. 부모의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이다.

     

어쨌든 세월은 까마득하게 흘렀다. 너희들을 낳아 서른 해가 넘도록 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너희들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 대견하다. 세속적으로 출세를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너희들이 세상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그러니까 너희들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그저 기독교가 우리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는 단순한 분들이었다. 우리는 지금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는, 한국기독교가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성장하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세계가 변화하는 원리는 개인적 신앙과 전혀 상관이 없다.

      

세상의 구성 원리는 아주 복잡하다. 많은 요소들이 서로 뒤엉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그 변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이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론 학습과 실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수밖에 없다.

      

너희들은, 나의 학창 시절에는 결코 넘볼 수 없었던 좋은 교육기회를 누렸다. 그래서 이미 유무형의 정신적 유산은 충분히 물려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모의 도움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터득했지만, 이제 너희들은 나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길 바란다.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면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어떤 결정에 조금이라도 불합리한 요소가 개입되면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우리나라가 헬조선이 된 것은 그동안 불합리한 결정이 수없이 누적되어 왔는데도, 이것을 교정하거나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사적 처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이는 자는 결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의 이치도 터득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면 세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부를 축적할 수 있다. 부의 축적은 평생을 먹고살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만약 그 이상의 부가 쌓인다면 그것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지 못해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을 제대로 깨우치는 데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바로 ‘너 자신이 돼라’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하고 끝내야겠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부모로부터 유형재산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너희들도 나에게서 물려받을 유형의 재산은 없을 것이다.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재산은 죽기 전까지 모두 소진할 생각이다. 그러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어 혹시라도 남는 재산이 있다면 너희들 엄마와 상의해라. 어떤 경우에도 유형의 재산이 자식들에게 상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엄마도 같을 것이다. 이렇게 유형의 자산은 없지만, 내가 그동안 쓴 글이나 강의 콘텐츠와 같은 무형의 자산은 조금 있을 것이다. 그것을 너희들이 균분하여 잘 관리하고 음미하면서 삶에 영양분으로 삼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내가 병상에 눕게 되어 의식이 사라지면 생물학적인 연명치료는 절대로 하지 마라. 그 상태에서 혹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장기가 남아 있다면 그를 위해 선물로 주도록 해라. 나는 풍수지리와 같은 허망한 사설(邪說)을 신봉하지 않는다. 산소나 묘 자리 같은 데 신경 쓰지 말고 화장해라. 모든 육체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다.

      

201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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