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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탱볼에세이 Aug 04. 2023

완주를 아십니까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그 동네

 완주로 이사 온 지 2주가 다 되어간다. 친구들은 완주랑 원주를 헷갈려한다. 거긴 강원도 원주고, 여긴 전라도 완주다. 그렇게 설명해도 완주가 어딘지 잘 모르니 그냥 전주 근처라고 설명한다. 마치 해외여행 가서 외국인들이 어느 도시에 사냐고 물어보면, 그냥 서울 산다고 말하는 경기도민이라 볼 수 있다.


 나도 전라도에 사는 것은 처음이라 새롭다. 경기도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줄곧 시흥과 안양에서만 살았다. 친구들이 다들 수도권에서 대학 다닐 때, 로망의 도시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나는 경상도에서도 살아본 경기도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형 인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다들 똑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하면, 그때마다 나는 청개구리 본능이 발동한다. 대학 졸업하고 다들 본가인 경기도에 살 때, 서울에 혼자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싶더라. 사실 서울에 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회사에서는 전격 원격근무 제도를 실시해서 어느 지역에서든 근무가 가능했고, 강남에 있는 사무실을 없앤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동네인 홍대 근처에 살고 싶어서 굳이 굳이 서울로 이사했더랬다.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열심히 서울살이를 즐겼다. 확실히 내가 살던 서울집은 위치가 내 맘에 들었다. 서대문구인데도 마포구 경계에 있어서 언제든 넘나들 수 있으며, 따릉이정거장이 있어서 바로 앞 홍제천을 따라 망원한강공원에 가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은 해보았고, 살고 싶은 곳에 살아보았다. 그래서 긴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후회가 없다. 새해부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여행을 6개월 다녀왔다. 돌아와서도 서울에서 다시 취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제는 시골로 내려와 부모님이랑 함께 살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은 직장에서 이제 자리 잡아서 결혼하고, 차 사고, 집 사고 하는데 말이다. 앞으론 회사를 다니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 살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방법을 찾을 것이다.


 사실 나의 이런 계획은 작년 초에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구체화되었다. 원래 이 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경기도로 올라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세를 주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동안 이 집을 와본 적은 사실 많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다시 와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이따금씩 하셨다. 그렇게 많이 그리워하셨다. 상황상 할머니를 혼자 여기서 사시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엄마와 아빠는 3년 전부터 주말마다 내려와서 집을 가꿨다. 황폐했던 모습이 조금씩 생기를 찾아갔다. 예쁘게 집을 가꿔서 할머니에게 다시 보여드리고 싶다는 아빠의 바람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인사도 없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때 다짐했다. 나중으로 미뤘던 모든 것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겠다고.


 사실 태생적으로 미루길 좋아한다. 특히 지금 할 일을 조금 있다가로 미룬다거나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그래서 엄마한테 맨날 설거지 미뤄놓는다고 혼난다. 이 글도 8월이 되면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지금 쓴다.


 이번주부터는 그래도 이 미루려는 습관을 벗어나보려고 엄마랑 아침 7시에 일어나 근처 저수지까지 걷기로 했다. 오늘이 3일 째다. 하루에 1만 보는 걸어보려고 친구 8명을 모아 [티끌도보클럽]을 만들었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혼자 못하겠으면 한 명 더 섭외한다. 그리고 돈을 건다. 그럼 내가 시작하자고 한 것에 책임감과 돈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생겨서 하게 된다.


 걷다가 태국 치앙마이에서 온 부부를 만났다. 엄마가 지난번에 걷다가 짐이 많아서 우연히 아저씨 차를 얻어 탔다고 한다. 아저씨는 한국에서 농사일한 지 5년이 넘으셔서 한국말을 잘하신다. 아주머니는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단어 몇 개로만 소통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일한 덕분에 태국에 집을 사셨다고 한다. 중고등학생이 된 자식들은 할머니가 태국에서 키워주고 계신다고.


 한번 만났는데도 내적친밀감이 상당하더라. 내가 치앙마이를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땡볕에서 일하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져서일까. 맞벌이하는 부모님에 할머니 손에 자라는 자식들이 있어서일까. 타지생활의 고단함을 나의 교환학생 경험에 비춰보아서일까.


 집에 돌아와 태국 라면(똠얌마마) 두 봉지를 가방에 넣어두었다. 오늘 또 마주쳐서 라면을 전해드릴 수 있었다. 똠양꿍맛 맛있는데 고맙다고 하셨다. 맛있다는 말을 태국어(아러이)로 하셨는데 알아들어서 뿌듯했다.


 그렇게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그 동네에서 살아간다. 할머니와 같이 살던 할머니들과 이웃으로 말이다. 다시 매일 글을 쓸 거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담아볼 것이다. 그것이 할머니를 기억하는 방법이니까. 완주에서의 글을 완주할 때까지 지켜봐 주시라. 강원도 원주가 아니라 전라도 완주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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