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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신 오딘

태초의 살해와 창조의 모순

by 무체

북유럽 신화의 시작은 낭만적이지 않다. 존속 살해와 피비린내 나는 도륙으로 시작된다. 태초의 공허인 긴눙가가프의 적막을 견디지 못한 오딘은 형제들과 결탁하여 거인족의 시조이자 세상의 주인인 이미르를 살해한다. 이 잔혹한 살해의 동기는 생존이 아니다. 무료함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오딘은 이미르의 살과 뼈를 찢어 대지와 산맥을 만들고, 피로 바다를 채웠다. 그가 만든 인간 아스크와 엠블라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피조물에 불과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딘이 저지른 원죄의 결과물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거인의 시체라는 그로테스크한 진실이 깔려 있다. 이 창조 설화는 오딘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핏줄도, 도덕도 짓밟을 수 있는 냉혹한 실용주의자임을 보여준다.


창조주가 된 오딘을 움직인 것은 안주가 아닌 끝없는 결핍이었다. 그는 운명의 샘 우르드, 질투의 샘 흐베르겔미르를 지나 지혜의 샘인 미미르의 샘으로 향한다. 이곳을 관장하는 미미르는 오딘이 죽인 이미르의 혈족, 외삼촌 격이었다. 조상을 죽인 원수에게 고운 시선을 보낼 리 만무했으나, 미미르는 거래를 제안한다.


"지혜를 원한다면 너의 한쪽 눈을 바쳐라."

북유럽 신화 속 오딘 영상으로 보기


오딘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눈을 도려내 샘물에 던진다. 이것은 단순한 신체 훼손이 아니다. 육신의 눈, 물리적 시각을 포기함으로써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심안, 통찰력을 얻겠다는 등가교환이다.


두 눈으로 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된 그는,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공포까지 감지하게 된다.


오딘의 지적 탐욕은 죽음 너머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에 거꾸로 매달려, 자신의 창 궁니르로 옆구리를 찌른 채 9일 밤낮을 식음을 전폐한다. 이는 북유럽의 샤머니즘적 입문 의식을 상징한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법의 문자인 룬을 터득한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신비한 힘을 얻어낸 이 사건은 그를 단순한 전사가 아닌 마법사 왕으로 격상시킨다.


수요일을 뜻하는 Wednesday는 오딘의 고대 이름인 Woden에서 유래했다. 그가 일상의 시간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존재임을 보여준다.


통제와 감시의 아키텍처


지혜와 마법을 손에 넣은 오딘은 철저한 감시 시스템을 구축한다.


후긴과 무닌. 생각과 기억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까마귀는 전 세계를 비행하며 정보를 수집한다. 오딘이 자신의 지각 능력을 외부로 확장시켰음을 의미한다.


게리와 프레키. 탐욕과 굶주림을 뜻하는 두 늑대는 그의 발치에서 오딘의 내면적 본성을 대변한다. 그는 자신의 식량을 이들에게 던져주며 포식자의 본능을 곁에 둔다.


흘리드스캴프. 이 의자에 앉으면 9개의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현대의 판옵티콘과 다를 바 없는 완벽한 감시 체계다.


던지면 반드시 명중하는 창 궁니르, 9일마다 8개의 황금 팔찌를 복제해 내는 드라우프니르는 무력과 경제력마저 독점한 그의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로키가 암말로 변신해 낳은, 다리가 8개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는 그에게 차원을 넘나드는 기동성까지 부여했다. 슬레이프니르의 어원은 '미끄러지다'를 뜻하는 Slippery와 닿아 있으며, 이는 경계를 허물고 질주하는 속성을 내포한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미래만은 가질 수 없었던 신


오딘은 지식, 마법, 부, 명예, 무력까지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이 모든 스펙 쌓기의 종착점은 허무하게도 불안이었다. 그는 예언된 종말, 라그나로크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시기와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가 발할라에 전사들을 모으는 행위는 다가올 파멸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다. 거대한 부와 지혜를 쌓아 올리고도, 결국 내분의 씨앗과 외부의 위협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오딘의 모습.


이는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늘을 혹사시키지만, 정작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신조차 운명 앞에서는 한낱 고뇌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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