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브런치에 글을 쓸까?
어떤 자기만족감 때문일까, 아니면 ‘제발 내 삶 좀 봐주세요’라는 절박한 외침 때문일까?
15년 동안 3천 권의 책을 읽으며 얻은 하나의 통찰이 있다. 우리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오토메이션 장비처럼 산다.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진화심리학이 말하듯,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해 자동화된 반응에 최적화되어 있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들고. 그 루틴 속에서 우리는 진짜 ‘나’를 잃어버린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
바로 그 자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글을 쓴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삶을 더 나은 쪽으로 고양시키고 싶어한다. 인정하고 싶든 싫든, 이건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 이상을 원한다. 의미 있게 살고 싶어한다.
“글쓰기는 생각하기다”라는 말이 있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텔레파시다”라고 했다. 내 머릿속 생각을 다른 사람의 머리로 전송하는 행위. 브런치는 바로 그 텔레파시의 채널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쓸지 모른다. “나 잘 살고 있어요. 내 삶도 알아주세요.” 또 다른 이는 더 굳건한 마음으로 쓸 것이다. “난 정말 멋지게 잘 살고 있다.” 그 스펙트럼 어디쯤에 우리 각자가 있다.
중요한 건 그 마음의 위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멈춰 서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현대인의 끊임없는 불안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성공의 기준에, 숫자로 환산되는 가치에 짓눌려 산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행위는 어쩌면 그 불안으로부터의 작은 탈출구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과 대화한다. 오늘 무엇을 느꼈는지,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지. 자동화된 삶의 루틴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공감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현대의 브런치 작가들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결국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서.
오토메이션 장비가 아닌,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살고 싶어서. 그저 하루하루를 지나보내는 게 아니라, 내 삶을 내가 직접 쓰고 싶어서.
우리는 오늘도 키보드 앞에 앉는다. 그리고 천천히, 한 글자씩 나를 증명해간다.
우노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