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3구역 동갑내기 빌라에 사는 어느 셀프 인테리어 중독자의 고백
출장을 다녀왔는데, 문 앞에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있었다. 등기가 아닌 이상 우편물을 집 앞에 두고 가는 일은 없는데. 등기가 올 일은 없고, 무척이나 중요한 서류인가 보네 하고 생각하며 보낸 이를 확인하니 ‘한남 제3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조합’이라고 적혀있었다. 받는 이에 내 이름은 틀리게 적혀있었다.(사실 나는 이 집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이름으로 된 공과금 고지서나 여타 우편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만 그런가? 어째서 확정일자를 받고 전입신고를 해도 고지서의 거주자 이름은 바뀌지 않는 걸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물 사용자 님’이라고 적힌 수도 요금 청구서를 받는다)
올 게 왔구나.
캐리어를 대충 던져두고 우편물을 뜯어보았다. "제목 : 관리처분계획인가·고시에 따른 이주 안내 등. 거주(점유)자님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우선 한남3구역 재개발정비사업으로 인하여 거주(점유)지를 이전하여야 하는 불편을 드리게 되어, 양해의 말씀드립니다. 3. 한남3구역 재개발정비사업은 초대형 사업지이며...(중략) 4. 이에 당 조합에서는 정해진 이주기간 내에 거주(점유)자들의 이주가 완료될 수 있도록 부득이 거주(점유)자 모두를 대상으로 사전 명도소송 등의 법적인 대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임을 '아래'와 같이 안내드립니다." 요약하자면 재개발 사업에 방해되지 않게 알아서 제때 나가라는 뜻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한남3구역이 한남동 재개발 구역 중 제일 진행이 빠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집주인이 계약 당시 재개발이 시작되면 지체하지 않고, 이사비도 별도로 청구하지 않고 군말 없이 이주할 것을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고 계약서 특약사항에도 강조해서 적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3년 내내 이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재개발이 아니더라도 이 집에서 겨울을 한 번 더 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3년 내내 수도가 터지지 않고 무사히 겨울을 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보일러 온도조차 제대로 조절되지 않아 난방비 폭탄을 맞기 일쑤인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의해서 강제로 밀려나는 경험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뭐랄까. 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까지 떠미는 느낌이랄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번 재개발 사업으로 한남3구역에 살고 있는 약 1만 가구가 움직일 예정이다. 그 영향으로 강북권 집값도 들썩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인데,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1만 가구가 서울 바닥 어딘가에는 흘러들어 가야 할 텐데, 재개발 구역의 전셋값이라고 해봐야 1억에서 2억 사이일 테고, 그 정도로 갈 수 있는 데는 뻔하지 않은가. 오래된 빌라나 연립, 다가구 같은 곳이겠지. 멀리 가는 것보다 가까운 곳을 선호할 테니 재개발이 덜 진행된 용산구의 다른 지역이나 중구, 성북구 쪽으로 갈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을까.
다들 어디로 갈까. 매일 퇴근길에 들르는 롯데마트 점원 분께 여쭤봤다. 재개발되면 이 마트는 어떻게 되나요? 여기는 끄떡없어요. 재개발이랑은 상관없지. 여기 사장이 이 5층짜리 건물 주인이니까. 재개발돼도 여기는 관계없어요. 그렇구나. 그대로인 것도 있구나.
우리 앞집 할머니는 어디로 가실까? 그 집에만 10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매일 새벽 길냥이 밥을 챙겨주는 이웃 님은 어디로 가실까? 만날 때마다 몇 살이냐고 물으시곤 마지막엔 교회 다니라고 호통치시는 옆 동 반지하에 사는 할머니는 어디로 가실까. 나는. 나야말로 어디로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