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는 1남 3녀 중 둘째다.자매 셋(엄마와 이모들)은 A지역, 남동생(외삼촌)은B지역에 산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할머니는 30년 전에 돌아가셨고, 자매들은 동생따라 언니 따라 이곳 A로이사왔다. 맨 처음 A에 터를 잡은 것은 우리 집이었다.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이곳으로 이사오게 되었고 살다 보니 38년이 흘렀다. 10년 전쯤 큰 이모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 이모가 A로이사해 오면서 자매가 모여 살게 되었다.
엄마와 이모들 그리고 외숙모는사이가 좋았다. 시누이-올케 사이인데다 사는 곳이 달라 명절, 제사 때나 한번씩 보고 말 법도 한데. 생일이나 축하할 일이 생기면 꼭 모여맛난 음식을 먹고 선물도 챙겨주었다. 멤버 넷 중 세 명이 A에 살다 보니 이곳에서 만나는 날이 많았다. 나도 A에 산다. 모임이 있는 날 혹은 모임 며칠 전,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뭐하니? 이모들하고 점심 먹기로 했는데.
- 나: 일하죠.
- 엄마: 오늘화요일인데? 2시부터 일하는 거 아니야?
- 나: 아, 네. 그런데 오전에 일이 좀 있어서요.
- 엄마: 그럼 와서 커피만 마시고 가.
- 나: 네...
당시 나는 오후에 일을 하러 다녔다.오전엔 후딱 집안일을 마치고 좀 쉴 법도 한데뭐가 그리 중하다고.아침에 짬을 내재봉 수업이며독서모임 등 기를 쓰고 무언가를 배우러 다녔다. 엄마가 전화하신 그날은 오전에 재봉 수업이 있는 날.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설거지와 청소 등 집안일을 바삐 해치우던 중이었다. 엄마는 전화해 이모들과의 모임에 나오라 했다. "일이 있다"라 말씀드리니 "오늘 화요일인데? 2시부터 일하는 거 아니야?" 라며 중간에 잠깐 들렀다 가라 하셨다. 파트타임 강사와 과외를 번갈아 뛰던 나는 요일마다 일하는 시간이 달랐다. 그런 나의 스케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엄마의 말에 순간 얼음이 되었다.수업 시간표를 공유한 것도 아닌데 엄마는 마흔 살 딸의 일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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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빛내주리라!
재봉 수업을 마치고 어른들 식사 중이신 곳으로 달려갔다. 엄마, 이모들 그리고 외숙모는 백화점 중식당에서 식사를 마무리하고 계셨다. 나의 등장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쳤다. "어머, OO이 잘 지냈니?" 이모들과 외숙모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네, OO도 잘 지내죠? 이번에 네이처 자매지에 이름이 올랐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외숙모", "이모, OO는 한국에 언제 들어와요? 한 번 놀러 가야 하는데." 나는 부지런히 사촌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진정 나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했을까? 문득 의구심이 든다. 어릴 때부터 내가 제일 열심히 한일은 엄마를, 가족을, 선생님을, 누가 됐든 그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그날 나는 모임에 나가 엄마를, 이모들을 그리고 외숙모를 기쁘게 해 주려 노력한 것 아니었을까? 그들의 (부모로서의) 위상을 치켜세워줌으로써 말이다.
서른 살 터울의 내가 그 자리에서 얼마나 재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겠는가. 무슨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겠는가. 같은 층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커피와 빙수를 사 드리고앉아있다가 필요하면 냅킨이나 스푼을 받아다 드렸다. 이야기를 경청하고, 큰 웃음으로 답하고, 그렇게 분위기를 맞추며 한 시간 가량 더 있었던 것 같다. "아쉬워서 어쩌죠? 출근해야 해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다음에 또 뵈어요."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먼저일어섰다.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는 미스코리아처럼... 나는 그렇게퇴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을까? 마음이 즐겁고 뿌듯했을까? 돌아오는 길, 가짜 웃음을 짓느라 굳어진 나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엄마의 트로피였다. 엄마를 빛내주는 트로피.우리 딸이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 얼마나 어른들께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인 줄 알아? 보여줘? 내세울 것 없는 나는 내 시간을 쪼개 어른들 모임에 나가 그들을 띄워주고 커피값을 내 드리는 '착한 딸'로서 '엄마'를 빛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