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담다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티서 Nov 19. 2021

변덕쟁이, 아니면 거짓말쟁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

  누군가를 만날 때 웬만하면 나를 트랜스젠더라 소개하지 않는다. 굳이 내 정체가 뭐라는 식으로 밝힐 필요도 없고, 또 밝혀봤자 어차피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게이나 레즈비언이라고 밝힐 때와는 또 다르게 사람들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 밝히는 사람에게 재차 묻는다. 정말? 아닐 텐데? 보기에 이런데? 마음가짐은 또 어떠니? 거봐, 아니잖아. 아닐 거야. 네가 맞다고 해도, 내가 판단하기에 넌 아니야. 수술을 안 한 내 경우에는 특히나 더 그런 질문을 많이 받고는 한다.


  나는 그래서 그냥 나오는 대로 편하게 행동하고 있다. 스스로 남자라고도 했다가, 트랜스젠더라고 했다가, 시디라고 했다가, 게이라고도 하고, 여장남자라고 하며 그냥 여자라고도 한다. 실은 여자라는 말은 선뜻 꺼내지 못한다. 그 순간 나를 정말 여자라고 해도 되는지, 상대에게 해명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냥 상대가 먼저 나를 여자로 대하면(대부분 트랜스젠더를 처음 대해볼 테니까 좀 서툴고 유치한 방식일 수는 있지만) 속으로 안도한다. 그럴 필요 없는 문제인데, 항상 고맙게도 느껴지는 것 같다.


  누군가에겐 내가 이렇게 프리하게 행동하는 것이 좀 의심스러워 보이는 듯도 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건 너무 진정성 없는 태도가 아닐까? 저걸 과연 단순한 변덕을 넘어선 정체성으로 인정해줄 수 있을까’하고. 나는 심지어 그런 사람들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절대 무슨 전위적인 행위 예술가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자이며, 남자이고,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이야!”라고 내가 먼저 복잡한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다. 하지만 나의 ‘변덕’에 대한 태클은 나도 예상 못한 순간에 걸려 오고는 한다.


  예컨대, 게이 집단에 관한 욕에 내가 발끈할 때. 그 순간 나는 내가 여전히 남성 퀴어를 내 모집단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 건가? 이제 게이가 아니라 트랜스 젠더라 선언한 이전의 말과는 모순되게? 내가 트랜스젠더임을 밝히자마자 내가 ‘남성기를 포기’한 것이 맞는지(정말 저 단어를 썼다) 따져 묻는 경우는 또 어떤가? 애초에 그 사람이 말하는 ‘남성기의 포기’라는 것이 어떤 맥락인지는 도대체 모르겠지만, 예컨대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몸에 대한 감각을 들키면 안 되는 건가? 아니, 저런 애초에 질문을 초면인 사람에게 해도 되는 건가?


  전자의 경우는 내 친구와의 대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내 불쾌함을 설명할 수 있었다. 혐오하는 자들의 언어 속에서는 게이고 호모고 트랜스젠더고 다 동의어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내 설명을 이해해줄 친구라 느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그 대화 이후 바로 나에게 운동보조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성불구가 된 남성을 코미디 톤으로 촬영한 유튜브 영상을 보여 줬다. 그 사람이 깔깔 웃기에 나도 그냥 허허 따라 웃었다. 그 영상이 웃기고 안 웃기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인지 평가하는 자리 같아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솔직히 어떤 식으로든 트랜스젠더를 인정한다는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분명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답답함을 넘어서서 화가 나는 트랜스젠더들 역시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지나치게 갈등을 피한다. 가끔은 자학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렇다고 모든 트랜스젠더들이 결코 나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는 더 당당하게 자신이 왜 성적지향에 부합하는 성별인지를 설명하는 트랜스젠더들도 존재한다. 때로는 상황이 이들에게 빈틈없는 설명과 당당함을 먼저 요구하기도 한다.

 

  예컨대 트랜스젠더 연구가이자 활동가인 수잔 스트라이커는 ‘패싱’을 위해 아예 자신들의 과거를 지우는 트랜스젠더들의 사례를 이야기한 바 있다. 날 때부터 생물학적인 여자 혹은 남자였던 척을 하기 위해, 본인의 유년과는 다른 모습의 유년 시절을 지어내기도 하고, 아예 주민등록 정정 이후엔 다른 트랜스젠더들과도 절연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왜 내가 다른 남자아이들과 다른지, 내가 여자일 수밖에 없는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왔던’(부정적인 의미 없이)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설명이 길어지면 그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모순이 발견되지 않을까? 자꾸 질문하는 쪽과 자꾸 대답해야만 하는 쪽이 있다면, 결국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언제나 대답하는 쪽의 사람인 것은 아닐까? 예컨대 많은 MTF 트랜스젠더들이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으로 ‘엄마의 립스틱을 훔쳐 바르던’ ‘엄마의 옷을 입고, 인형 놀이를 하던’ 기억을 꼽고는 한다. 내 경우에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사실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자기 서사를 만들 때 우리는 결국 이미 사회에 존재하는 서사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분석을 믿는다. 오로지 자신의 머리 안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어디 있으며,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게 타인에게 어떻게 가 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복잡한 설명까지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저 트랜스젠더들의 설명이 얼마나 천편일률적이며, 피상적인지(‘본인이 여자라고 믿는 근거가 고작 립스틱?’ 류의), 결론적으론 성별 정체성이라는 주장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인지를 평가한다. 물론, 화장품이나 여성복 이상의 훨씬 근사한 근거를 댈 수 있는 트랜스젠더는 정말 드물다. 생각해보라, 과연 자신이 여자 혹은 남자라고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증명할 수 있는 시스젠더는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좀 이야기가 새는지 모르지만, 나도 꼭 그런 유년 시절에 관해 그런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엄마의 열린 옷장. 그 안에 매어져 있었던 부드러운 스카프들. 확 풍겨 나오는 낡은 화장품 냄새. 곰팡이가 낀 거울. 나는 까치발을 들어야만 거울에 얼굴을 비출 수 있었던 그 성인 기준의 높이에 관한 감각까지. 퀴어 아마추어 드로잉 모임에서였다. 모두들 가지고 있는 성적지향이나 지정성별이 달랐지만 우린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성역할과는 다른 방향의 욕망에 대해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었다.

   

  거의 사이비 대체의학 같은 주장이지만, 한 FTM 친구와 정체화와 몸의 변화(구체적으로는 가슴의 변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 친구가 자신은 정체화 이후에 확실히 가슴 크기가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나는 듣고서 너무 놀랐다. 나 역시 정체화 이후에 전보다는 가슴이 좀 볼록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달라졌다는 감각을 분명 느꼈었기 때문이다. 뭐, 지금 이게 사실이다 아니다를 내가 증명할 능력은 없다. 그냥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완전무결한 설명이나 회피 없이도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들까지 그냥 같이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어.” 그니까, 어쩌면 캡틴 마블의 이 말이 정말 딱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비록 이 언어 역시 감히 트랜스젠더들이 사용할 수는 없다고 시비가 붙기는 했었지만.) 나 역시 영화의 딱 저 부분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나의 감상을 밝힐 필요도 없이, 나의 진실과 진심은 결코 타인이 심사할 수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머리로는 아는데, 일단 캡틴 마블을 온당하게 평가하는 사람들 자체가 한 줌이다. 누군가는 그저 여성 서사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한다. 뭐 말이 통해야 의미를 가지고도 싸우지. 게다가 심판의 권력을 남에게 뺏기지 않는다, 이게 어디 내가 마음먹는다고 다 이뤄지는 일인가? 세상은 (뭘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하느냐 싶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시스젠더 중심적이다. 게다가 타고 난 내 성격은 또 어떻고? 나는 친구들이 수영 취미를 추천하는 걸 거절하는 문제에도 쩔쩔매는 사람이다. 나는 타인 앞에서 남자 수영복만 입은 채 돌아다니고 싶지 않고, 이는 단순히 숫기 없는 남자의 고민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직접 설명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은 쓰는 수밖에 없다. 시스 사회의 눈치를 열심히 보다가 결국은 미쳐 돌아가는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쓰리라. 위에도 말했듯이 약자에겐 질문이 따라오고, 질문은 모순을 낳으니까. 이 모든 모순의 지점들을 내가 아닌 영역으로 밀어낸다면? 나라고 인정한 상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트랜스젠더의 상이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 이야기 속의 유령은 아주 정열적인 트랜스젠더가 될지도 모르겠다. 우주의 반쪽이 너무 좁다는 듯이 비행하는 캡틴 마블처럼, 나의 그녀도 분명 한 집안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