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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Nov 12. 2019

#26. 딸의 결혼식

전지적 아빠 시점

 새벽 6시쯤 아들과 목욕을 하러 갔다. 평소보다 면도에 공을 들였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앉아 있는데 병을 하나 준다.

 "아빠, 우황청심환."

 "그래. 당신 먹어야 해. 얼른 마셔."

 "무슨, 이런 거 안 먹어도 되는데."

 이미 손은 뚜껑을 열고 있었다. 쭉 들이켜고 나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내와 함께 예식장으로 가서 혼주석에 주차했다. 30년 넘게 결혼식장을 다녔지만 내가 이렇게 널찍한 데 차를 세울 날이 올 줄이야. 미용실에 들어가니 딸이 변신하고 있었다.

 "아빠, 안녕!"

 "아버님, 오셨어요~"

 "이쪽으로 앉으시면 저희가 금방 준비해드릴게요."

 난생처음 화장이라는 걸 해봤다. 얼굴만 하얗게 동동 뜬 것 같아서 영 어색하고 신경 쓰였다. 역시 우황청심환 먹길 잘한 것 같다. 조그만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사위가 예복을 맞출 때 나도 얼떨결에 양복을 하나 했다. 너무 비싸서 망설였는데 아내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30년 넘게 키운 딸 결혼식인데 당신도 이 정도 입을 자격 있어. 그냥 해."


 아이들이 다 한 결혼에 나도 뭔가 작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화환을 해볼까 했는데 잠깐 세워두면 끝이고 제대로 볼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검색하다 보니 그림 화환이라는 게 있었다. 신랑, 신부 사진을 보내주면 그림을 그려주고 문구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정작 딸은 못 본 그림 화환 (그림은 생략)

 

 입구에 세우고 보니 화려한 화환에 묻힐 것 같았는데 다행히 눈썰미 좋은 하객들 여럿이 사진을 찍어갔다. 아내, 아들과 손님을 맞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결혼식이 시작됐다.     

 

 걸어 들어가는 사위의 뒷모습을 보면서 딸과 서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너희 앵커도 오셨냐?"

 "오신다고 했는데 아직 안 오셨나 봐."

 딸이 하객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 신부가 아버님의 손을 잡고 들어오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신부 입장!"

     

 어렸을 때부터 툭하면 넘어지고 깨져오던 녀석이었다. 잘 걷고 있다가도 안 보여서 뒤를 돌아보면 땅바닥에 엎어져 있곤 했다. 양쪽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냐며 여러 번 구박했는데 지금도 종종 그런단다. 여기서 넘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힘을 꼭 주려고 했더니 오랜만에 잡은 딸아이의 손이 여전히 작았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무사히 사위에게 딸의 손을 넘겨주고 아내 옆에 앉아 땀을 닦았다. 두 번째 할 일은 성혼선언문 낭독.

 "바쁜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저희 아이들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내빈 여러분과 가족 친지께 양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어쩌자고 첫 문장부터 이렇게 길게 썼을까. 쉼표도 없다.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젊은 애들 랩 하는 것처럼 빠르게 읽었다. 자리로 돌아와 바싹 마른입을 축였다.      


 아이들은 결혼식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특히 딸은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하객석에 앉아 있던 친구들과 눈짓을 해가며 떠드는데 보는 내가 다 정신이 없었다.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쟤는 왜 저렇게 신난 거야?"

 "가만히 있으면 울까 봐 일부러 저러는 거잖아. 잘 봐봐. 어디가 신났어."

 괜히 한 소리 들었다. 잠시 후 딸과 사위가 인사를 하러 왔다. 일어나서 안아주려는데 딸이 나지막이 말했다.

 "울지 마. 울지 마. 울면 5만 원." 

 딸은 한 달 전부터 울 거면 돈을 내라고 했다. 좋은 날 사연 있어 보이는 게 싫다며 어찌나 단속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까지 저럴 줄이야.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주위에 본인만큼 노래 잘하는 사람이 없다며 사위가 직접 축가를 불렀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처음에는 이유 없이 저놈이 미웠다. 착하고 예의 바르고 나랑 술도 잘 마셔주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심술이 났다. 딸을 빼앗아 가는 도둑으로 보인다는 말은 진짜였다. 그러다 문득 나의 장인이 떠올랐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신 그분은 남자답지 못하다며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나를 탐탁지 않아 하셨다. 말주변도 없고 직장도 구하기 전이라 안 그래도 주눅 들어있는데 대놓고 싫어하셔서 눈치를 많이 봤었지. 그랬던 내가 세월이 흘러 그분 자리에 앉았다. 아버님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신랑, 신부 행진!"

 봄날처럼 환한 아이들이 씩씩하게 걷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결혼식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던 딸도 언젠가는 알게 될까. 평생 두 사람이 함께할 날에 지금 이 순간이 두고두고 힘이 되리라는 것을. 바람이 거친 날, 부디 오늘을 기억하고 높은 파도를 겁내지 않길 바란다. 잘 살아라,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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