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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27. 2018

오른편에서 물드는 가을

충분히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받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이라던가 마침내라는 말로 시작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으로 어쩌면 이 어려웠던 감정을 조금이라도 정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도 좋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을 뿐이다. 여자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내린 결정은 헤어지자는 것이었다. 그 망설임은 통화 중에 생기는 간헐적인 침묵 속에서, 산책길에서 불현듯 엇갈리는 걸음걸이에서 묻어나는 불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는 가을비가 내린 날이었고, 여자는 지난 봄 몇 번이나 연습했던 고백의 말 대신 이별의 말을 상기시켜보았다. 이제 그만하자던가 헤어지자는 말.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남자가 덜 상처받고, 여자가 덜 상처를 주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별의 말이란 늘 그렇듯 칼자루 없는 칼과 같은 것이어서 양쪽 모두에 흉터를 남긴다는 사실을 몇 번의 연애를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덜 아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남자도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 연애에 대한 어떤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남자에게 무언가 상처를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는 남자의 눈동자라던가 언제나 세심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건네는 그의 말이 때때로 여자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여자를 힘들게 했다. 충분히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받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사랑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하려고 노력해왔지만 남자 앞에서의 여자는 조금 어설펐고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불안한 여자의 마음을 읽은 남자는 종종 여자에게 사람과 사람은 똑같은 크기와 무게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라 말했지만 여자는 그럴수록 사랑의 강도와 형태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소 위나 천칭저울 위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한없이 내려가는 그를 바라보며 끝없이 위로 떠올랐다. 누군가는 여자에게 연애를 하면 하늘을 걷는 기분이라잖아,라며 낯간지러운 말을 했지만 여자는 차츰 숨을 쉬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허공에서 한없이 발을 흔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여자는 헤어지기로 결심을 했을 뿐이다. 

  카페에서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비는 거세졌다. 창밖으로는 우산을 든 사람들이 춤추듯 서로를 엇갈려지나갔다. 머플러를 두른 사람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겉옷을 챙기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는 조금 두께감이 있는 겉옷이 아니면 꽤나 쌀쌀하게 느껴졌다. 가을의 속도란 짐작할 수 없었다. 자다 일어나서 창을 닫았고, 침대에서 내려오다 발바닥에 닿는 찬기운에 깜짝 놀랐고,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입으면 분명히 감기에 걸릴 것 같은 날로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다. 계절의 경계가 그라데이션처럼 불분명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선을 그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선이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 놓인 것만 같아서 여자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천천히 물이 드는 일이 연애라고 믿어왔지만 여자는 여자의 테두리를 모두 무너뜨리며 다가오는 남자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서로가 서로를 밀거나 당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상에 스미고 마음을 닮아가는 모든 순간들에서 여자는 자신을 잃는 것과 동시에 남자를 잃는 기분이었다. 입이 자꾸만 말랐다. 하지만 이별이라는 짧은 단어 앞에서 사람과 사람의 사이란 얼마나 간단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오른쪽 어깨가 젖은 남자가 여자의 앞에 앉았다. 

  남자는 우산에 붙어있었다며 젖은 단풍잎 하나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지난 봄날에는 남자가 모자 위에 떨어졌다며 벚꽃잎을 몇 장 내밀었던 것이 떠올랐다. 여자가 아직 초록이 남아 있는 단풍을 오래 들여다보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참 신기해.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 순간 단풍이 들어있지만 단풍은 나름의 속도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거 말야. 그런데 단풍이 늦게 든다고 조급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그렇게 어느 순간 깊은 가을이 오는 게 참 놀랍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은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여자는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오른쪽 어깨부분에는 진한 빛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결국 남자와 헤어질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면 남자의 오른쪽어깨는 늘 젖었다. 남자의 왼쪽에는 늘 여자가 있었고, 두 사람 위의 우산은 언제나 왼쪽으로 기울였다.

  여자는 우산을 오른쪽으로 밀어주는 일로 이 불안한 관계의 온도를 맞추기로 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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