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사진 한 장

흑백 사진에 묻어둔 나의 뿌리

by 건강한 오후

이사할 때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두었던 낡은 앨범을 무슨 생각에선지 문득 펼쳤다. 어머니가 평생을 아끼셨던 앨범이다. 두꺼운 비닐 사이에서 색이 바래 누렇게 변한 종이 냄새가 났다. 수많은 가족사진을 뒤적이다가, 앨범의 가장 앞페이지에서 그 사진을 발견했다. 부모님의 신혼여행 사진, 칠십 년 전 흑백 사진에 고정된 두 분의 젊은 날이었다.


사진을 손에 들고 오래 바라보았다. 종이의 테두리는 세월에 닳아 모서리가 둥글었고, 표면에는 자잘한 금이 가 있었다. 마치 오래된 도자기의 유약처럼, 금이 간 자국들이 두 분이 살아온 시간을 은밀하게 증언하는 것 같았다.


사진 속 아버지는 넥타이를 맨 검은 정장 차림이셨고, 어머니는 소박한 흰 한복 차림이셨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두 분의 머리 위로는 '혼(婚)'이라는 글자가 뚜렷했다. 완벽하게 설정된 배경과 달리, 사진 속 두 분의 자세와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왼손에 담배를 들고 서 계셨는데, 넥타이는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고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굳건함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몸을 살짝 아버지 쪽으로 돌리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계셨는데, 그 자세에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가 느껴졌다.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세월에 무뎌진 부모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날것 그대로의 청춘이었다.


나는 이 사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진은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혹은 완벽한 행복의 절정인 것처럼 고정했지만, 사진 밖 세상은 고단하고 불안정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대였다. 두 분의 삶은 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뒤를 이을 수많은 날들이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것을, 나는 두 분의 아들로서 가장 잘 안다.


사진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다. 아버지가 짊어져야 했을 가장의 무게, 어머니가 견뎌야 했을 낯선 삶,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불안이 사진 안에 잠들어 있었다. 사진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나는 두 분의 젊은 날의 묵직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거칠지만 힘이 있었고, 불안하지만 용기가 가득했던 삶의 목소리



이 사진 속의 두 분이 없었다면, 지금 이 낡은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흑백 사진이 바로 나의 원점이며, 나의 뿌리다. 나는 두 분의 치열했던 견딤의 결과이고, 그분들이 이룬 사랑과 성실함의 증거다.


50대 후반이 되어 인생의 황혼기를 바라보는 지금, 나는 사진 속의 두 분이 지닌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 고난을 맞설 준비를 한 듯한 자세를 본다. 그 당시에는 막막함이었을 그 자세가, 지금 내 눈에는 세월을 정면으로 받아내겠다는 결의로 읽힌다. 그분들은 그 사진 이후 수십 년을 흔들리며 살았지만, 결국 그 단단한 뿌리는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 묵묵함 견딤이 지금 나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시간을 건너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과거는 흘러가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낡은 사진 한 장은 시간의 일부를 고스란히 움켜쥐고 있다. 이 사진을 통해 나는 부모님의 가장 먼 과거와 가장 가까이 대화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부모님의 젊음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사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인화지는 얇고 찢어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 안에 담긴 힘과 온기는 쇠처럼 단단하다. 사진은 부모님 세대의 침묵이 건네는 가장 묵직하고도 따뜻한 위로였다. 그 위로는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너의 뿌리가 여기 있다. 잘 버텨온 너의 삶도 이처럼 단단할 것이다"라는 무언의 격려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진을 다시 앨범의 첫 페이지에 조심스레 넣었다. 흑백 인화지에 묻어둔 부모님의 젊은 흔적은, 끊어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온기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