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불행, 스치는 행복

by 건강한 오후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이 유명한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 통찰의 날카로움에 감탄했다. 그러나 5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 문득 의문이 일었다. 정말 불행은 그렇게 각자 고유한 것일까? 오히려 불행이야말로 가장 닮아 있는, 인류가 공유하는 경험이 아닐까?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깨달았다. 불행의 형태는 무수히 다양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고독, 상실, 무력감, 그리고 시간의 무정함에 대한 절망. 이런 감정들은 언어와 문화, 나이와 성별을 넘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예전에는 나만이 특별히 외롭고 억울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임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장례식장에 갔을 때였다. 오랜 벗을 잃은 슬픔에 숨이 막힐 듯했지만, 곁에서 울던 또 다른 이의 눈물을 보며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았다. '아, 나만 겪는 일이 아니구나. 이 무게는 누구나 짊어지고 있구나.' 그 순간 불행은 더 이상 고립의 벽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느껴졌다.


젊은 날의 행복은 크고 또렷했다. 대학 합격, 첫 직장, 승진 같은 성취가 나를 들뜨게 했다. 그때의 행복은 비교 가능했고, 남들과 나눌 수 있었기에 더욱 뚜렷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행복의 얼굴은 작아지고 불행은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아침 거울 앞에서 느끼는 허무, 친구의 근황을 들은 뒤 남는 씁쓸함, 젊은이들의 활력을 바라보며 밀려드는 위축감. 큰 사건이 아닌 일상의 틈새에서 스며드는 불행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런 불행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외롭지 않았다.


SNS의 화려한 사진들, 지하철 객실의 고독한 얼굴들—다 다른 풍경이지만 불행은 닮아 있었다. 박탈감조차 공유되는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행복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다. 늦은 저녁 산책길에 스치는 바람, 낯선 이와의 짧은 미소, 손바닥을 덥히는 커피잔의 온기. 이런 순간들 속에서 행복은 찰나처럼 나타났다. 그것은 커다란 성취의 환호가 아니라, 스쳐가는 순간의 빛이었다.


병원 대기실에서의 경험도 잊을 수 없다.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비슷한 근심을 안고 앉아 있었다. 한 중년 여성은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옆자리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남자는 발을 구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공기 속에는 묘한 위안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같은 불안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였다. 그것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었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 내 억울함을 내려놓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제 나는 불행을 억지로 몰아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강물처럼 흘러가도록 두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작은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이 감정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흘러가리라는 믿음이 나를 지탱한다.


요즘 나는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서둘러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그저 함께 앉아,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인지, 나 스스로의 불행을 덜어내려는 행동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확신이 꼭 필요할까.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존재다.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이해받기를 갈망하면서도 이해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눈빛 하나, 짧은 침묵 속에서도 깊이 연결된다.


아마 행복은 바로 그 순간들에 잠깐 얼굴을 내미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성취나 드라마 같은 사건이 아니라, 함께 있음의 공명, 따뜻한 숨결 같은 것 말이다.


이제 나는 톨스토이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불행한 가정들이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아니다, 불행은 닮아 있다. 그 닮음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그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