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와 기호, 그리고 기호의 가치
일러두기
1. 앞의 글들을 우선 읽기를 추천합니다.
2. 본문 안에서 타이포그래피 용어는 띄어 쓰지 않았습니다.
3. 윤문이 되지 않은 글입니다.
¶ 글자사이
우린 이제 익숙하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글자사이란 무엇인가? 당연한 듯 보이는 것에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언제나 생각을 깊고 넓게 확장할 수 있으며, 또한 질문은 디자인 과정의 중요한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자이너의 ‘질문’은 ‘문제’에 대한 질문도 아니고, ‘정답’이라는 목적을 향한 것도 아니다. 때론 문제없이 던지는 ‘질문’이며 ‘정답’ 없는 질문이다. 디자이너의 질문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질문은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다양한 관점 자체가 더 나은 것으로의 진보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관점이 인간다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당연해 보이는 개념에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멈춰있지 않을 수 있으며, 인류의 진보라는 큰 파도 안에서 각자 다양한 인간다움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배우는 분야 그리고 당장 ‘글자사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진보의 과정을 소유할 수 있고, 이는 우리를 좀 더 타이포그래피에 가깝게 이끈다.
앞에서 글줄사이는 어떤 형태에 의미를 부여해 ‘읽는’ 것으로의 시각 기호를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글자사이는 시각 기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글자사이는 말 그대로 ‘낱글자’와 ‘낱글자’의사이 공간을 이야기 한다. 한글에서는 하나의 ‘낱’ 글자를 온전히 구분하여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기호의 가치판단에서 수준 높은 것으로 만들며, 적절한 글자사이 간격은 시각 기호로 인지된 형태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지 시킨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정보로서 가치가 매겨지는데 일정하고 적절한 글자사이 간격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5만 원 지폐의 숫자가 나열된 것을 보자. ‘50,000’이라고 나열된 아라비아 숫자는 일관된 글자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4개의 ‘0’ 중에서 하나가 앞 글자와 가깝고 뒷 글자와 거리를 두고 있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은 두고두고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로고타입을 사용한 기업 아이덴틴티에서도 글자사이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에 의문을 갖게 된다. 일정하고 세밀하게 고려된 간격의 글자사이는 언제나 우리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로서의 의미를 전달한다.
타이포그래피에서 글자사이는 시각 기호의 ‘신뢰’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한 문장 혹은 문단에 나열된 한 그룹의 글자들은 항상 일정한 간격을 가질 수 있게 배열되어야 한다. 그럼 비로소 글자가 가진 기호로서의 의미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의미는 ‘믿을 수 있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때론 믿을 만한 정보라는 것을 판단할 때. ‘정보’ 그 자체보다는 정보를 감싸고 있는 다양한 감각 가능한 경험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몇몇의 심리 실험을 통해 사람의 결정이 감각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 면접 심사관이 면접에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지, 아니면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지에 따라서 당일 합격률이 달라진다는 실험 결과는 이미 현대인에게 놀랄 일이 아니다. 이처럼 적절한 글자사이 간격을 가진 문장의 정보, 즉 의미가 그렇지 않은 문장보다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퍼는 언제나 낱글자와 낱글자사이에 적절함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하고,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 활자면과 활자틀
앞서 이야기했듯 글자사이는 ‘낱글자’와 ‘낱글자’의 간격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간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활자틀과 활자면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금속활자로 다시 돌아가 보자. 금속활자 낱글자 한 개는 육면체의 기다란 막대처럼 생겼다. 막대 끝에는 네모난 면이 있고, 그 위에 글자꼴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 잉크가 묻는다. 이때 글자꼴이 볼록하게 튀어나올 수 있게 바탕이 되는 네모난 틀이 ‘활자틀’이고, 잉크가 묻는 면을 ‘활자면’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활자틀은 ‘메탈 타입 바디’ 혹은 ‘숄더’라고 부르는데,.숄더는 긴 금속활자의 어깨쯤 오는 부분이라고 해서 숄더라고 부른다. 활자면은 영어로 ‘타입페이스(typeface)’라고 번역하는데, 일반적으로 금속활자는 ‘틀’ 위에 ‘글자’를 새겨 글자꼴을 완성하기 때문에 글자꼴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볼록판화와 빗대어 이야기하면 판화가 새겨지기 전 전체 틀이 ‘활자틀’이고, 판화가 새겨져서 잉크가 묻게 되는 부분이 ‘활자면’과 같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형태가 되는 활자면은 배경이 되는 활자틀보다 작게 만들어진다. 이때 활자면과 활자틀의 차이로 생기는 글자꼴 주변의 여백을 ‘글자여백(사이드베어링)’이라고 부른다. 글자사이는 이러한 글자여백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데, 앞 활자의 글자여백 일부와 뒷 활자의 글자여백 일부가 만나 만들어진다. 가로짜기라면 앞 글자의 ‘오른쪽 글자여백’과 다음 글자의 ‘왼쪽 글자여백’이 만나 글자사이가 된다. 그래서 글자꼴을 디자인할 때 정해진 배경인 활자틀 위에 활자면을 어느 위치에 놓을 것인지는 언제나 글자사이에 영향을 미친다. 글자꼴 디자이너는 이러한 점을 언제나 신중하게 고려하는데 이는 일정한 글자사이를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폰트 크기’는 활자면이 아닌 활자틀의 높이를 말한다. 그래서 활자틀 위에 활자면이 꽉 차게 디자인되면 다른 글자꼴 보다 같은 물리적 크기(활자틀 높이)에서 더 커보고 반대인 경우는 작아 보인다. 이는 글자의 ‘시각적 크기’에 영향을 미친다. 시각적 크기는 물리적 수치보다 시각적 착시에 의해서 작아 보이거나 크게 보이는 것을 말하는 데. 엄밀히 말하면 활자면의 높이는 시각적 크기는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크기와 다르기 때문에 시각적 크기의 범주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글자 크기를 생각할 때는 활자틀의 물리적 크기가 아닌 실제 눈에 보이는 시각적 크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는 각 폰트의 개성에 따라서 모두 다르게 인식되며, ‘글자꼴 보기집’을 만들고 구입하는 건 모두 이러한 이유다. 실제로 사용되고 인쇄된 상태를 미리 경험해 보고, 글자꼴을 사용하기 전에 글자꼴의 개성을 홍보하거나 시각적 크기를 미리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특히 금속활자 시대에는 ‘글자꼴 보기집’이 아주 유용했는데, 글자꼴 보기집이 없다면 글자꼴의 개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도 글자꼴 보기집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글자꼴 형태 특성과 시각적 크기를 판단하기 위해 작업자가 직접 다양한 매체에서 미리 시각적 테스트를 진행하는 편이 좋다. 이는 글자꼴의 개성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감각된 경험의 바탕은 세밀한 타이포그래피를 가능하게 한다.
¶ 시각적 크기
앞에서 활자면 크기는 각 폰트의 시각적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하였는데, 실제 시각적 크기의 착시효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글자의 속공간(counter space)이다. 글자의 속공간은 라틴 알파벳 ‘o’의 안쪽 공간 크기를 이야기한다. 한글에서는 글자의 속공간과 더불어 각 자소간의 간격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를’보다 ‘므’가 속공간이 더 커 보이고 시각적으로도 다른 크기처럼 보인다. 글자의 속공간은 활자면의 크기와 더불어 시각적 크기를 좌우한다. 한글과 라틴알파벳을 비교해 보면 한글은 같은 활자틀 높이에서 라틴알파벳 소문자보다 더 높은 활자면을 갖고 있어 시각적 크기가 더 클 것으로 예상되지만, 라틴알파벳의 속공간이 한글보다 크기 때문에 실제로는 비슷하거나 크게 차이가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라틴알파벳 내에서도 x높이에 따라 같은 물리적 크기에서 시각적 크기를 달리한다. 그래서 서양의 현대주의 타이포그래퍼는 같은 크기에서 더 크게 보이는 부리가 없는 산세리프 글자꼴이 기능적인 글자꼴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시각적 크기와 글자사이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우리는 글자사이의 적절한 간격이라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는데, 언제나 형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글자사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고민해야 한다. 여러가지 이유 중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글자 속공간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속공간이 클수록 글자꼴의 시각적 크기는 커 보이기 때문에 글자사이는 다소 간격이 멀어져야 한다. 반대로 속공간의 크기가 작다면 글자사이는 약간 좁은 간격을 갖는 것이 적절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도 돋보임용(제목용) 크기에서는 다르게 적용되지만 이는 다시 설명하도록 하고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자. 라틴알파벳에서는 x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글자꼴이라면 글자사이가 넉넉한 것이 좋을 것이다. 한글에서는 어떨까? 한글도 속공간의 글자꼴의 크기를 좌우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는 라틴알파벳보다 좀 더 복잡하다. 한글은 대체로 고정된 네모꼴 활자틀 안에서 활자면이 디자인되기 때문에 글자의 획 수에 따라서 속공간의 크기가 각 글자마다 다르게 형성된다. 그래서 한글의 시각적 크기를 이해할 때는 속공간의 크기가 다른 ‘그, 를, 미, 빼’와 같은 각 글자들을 관찰하고 종합적 고려해 평균적 시각적 크기를 판단해야 한다. 특히 이 중에서 한글의 시각적 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닿자(초성)’의 크기이다. ‘닿자’라는 이름은 닿아서 나는 소리글자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디지털 글자꼴인 ‘산돌 명조’와 ‘윤명조100’ 글자꼴을 비교해 보면 첫닿자의 크기가 큰 윤명조100이 산돌 명조보다 같은 포인트의 크기에서 시각적으로 더 커 보인다. 그래서 한글에서는 닿자의 크기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뿐만 아니라 한글의 글자사이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은 또 있다. 한글에서 일정한 글자사이를 판단하는 것은 라틴알파벳보다 어렵다. 라틴알파벳은 글자의 왼쪽면과 오른쪽면의 형태가 단순하고, 알파벳끼리 조합되는 만들어지는 글자사 형태가 한정되어 있어 일정한 글자사이 공간을 판단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 원래 세로쓰기로 고려된 글자의 형태 탓에 가로쓰기에서 다양한 문제점들을 보이는데 특히 일정한 글자사이를 판단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영어로 ‘handglove’라고 썼을 때 글자사이 간격의 형태를 보면 그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글자사이간격’이라고 쓰면 ‘글’과 ‘자’ 글사이의 형태, ‘자’와 ‘사’의 글자사이의 형태가 모두 다르게 만들어 진다. 시각적으로 각각의 낱글자의 글자사이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한글에서는 한 줄의 전체적인 글자사이 값의 평균을 시각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 문단의 글자사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특정 글자끼리 과도하게 붙어있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이는 글자사이가 좁아지는 경우 더 두드러 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붙어보이는 글자들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좁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할 때는 각각 낱글자간의 절대 공간으로 판단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어서 여러 번 출력해 보며 전체적인 글자사이 공간의 평균값을 시각적으로 훈련하며 익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은 고정폭 네모꼴활자틀 한글이 형태적 ‘기능’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라틴알파벳 보다 불편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는 한글을 라틴알파벳 처럼 쓰고자 하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대표적으로 ‘한글풀어쓰기 운동’이 있다. ‘한글’을 ‘ㅎㅏㄴㄱㅡㄹ’이라고 써야 한다는 운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한글이 갖고 있는 우수한 진보적인 시각 기호학적 특징을 제거하는 일이다. 한글은 자소 조합을 통해 낱글자가 완전한 하나의 음절과 통일된 유일한 글자이다. 이는 형태적 관점이 아닌 기호학적 관점에서 가장 진보된 것이다. 그래서 한글풀어쓰기 운동은 이러한 부분을 후퇴시키는 운동이었고, 이는 사대주의의 영향이 크다. 한글 풀어 쓰기는 시각적 유희와 의도된 시각 디자인에서만 유효하다. 때론 글자를 다루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한글’ 글자와 글자꼴이 라틴알파벳에 비해서 제한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한글의 개성이 아닐까?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어린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니 그것이 가진 풍부한 가능성을 누리는 것도 언제나 우리의 몫이다.
¶ 글자사이 짜기
그렇다면 한글에서 적절한 글자사이란 어느정도 일까? 우선 가로쓰기 한글에서는 글자의 획끼리 붙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좁힌 상태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글은 조합되는 위치에 따라 세가지 구조를 갖고 있는데, ‘가로모임글자’, ‘세로모임글자’, ‘섞임모임글자’라고 부른다. 가로모임글자는 ‘하’, ‘한’같은 글자이며, 세로모임글자는 ‘호’, ‘홈’, 섞임모임글자는 ‘화’, ‘환’ 같은 글자가 있다. 받침이 여부에 따라서 ‘가로모임민글자’, ‘가로모임받침글자’라고 한다. 한글에서 최소한의 글자사이는 가로모임글자에서 사용되는 홀자(중성) ‘ㅏ’의 곁줄기(가로줄기)와 세로모임글자에서 사용되는 ‘ㅜ’등의 보(가로줄기)가 함께 놓여졌을 때 서로 맞닿지 않아야 한다. 만약 둘이 붙어 보인다면 한글의 글자사이가 상당히 좁아보이는 상황이라고 할수 있다. ‘아주아주’와 같은 단어에서 ‘곁줄기’와 ‘보’가 붙어 보인다면 시각적으로 ‘이주이주’로 읽힐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좁은 글자사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글자사이가 넉넉해진다면 어떨까? 이때 낱말사이 공간을 넘볼 정도로 간격이 넓어져서는 안 된다. 현재 한글 타이포그래피에서 많이 사용되는 낱말사이는 3분각인데 정사각형 활자틀을 3등분 한 정도의 넓이(활자틀 너비의 30%정도)이다. 이 공간이 모호해 보이는 정도까지 글자사이 넓어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 지만 낱글자간의 적절한 결속력이 유지되어 낱말사이와 구별되어 온전한 하나의 ‘낱말’이 될 수 있다. 현재까지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글자사이가 ‘적절하다’는 범주에 속해있다. 하지만 타이포그래피에 있어서 ‘적절함’이란 언제나 특정 시대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글자사이를 일정하게 조절하기 위해 어떤 척도를 사용해야 할까? 과거의 식자공들은 글자사이를 일정하게 조절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 결과가 ‘분각(유니트)’ 개념이다. 정방형(정사각형) 활자틀을 수직으로 일정하게 나눈 조각을 사용하여 글자사이를 조절했는데 이 조각을 분각이라고 한다. 이는 글자의 크기가 커지더라도 일정한 간격 비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분각은 정방형 활자틀을 몇 등분 하느냐가 중요했는데, 금속활자 크기에 따라 금속활자 인쇄기술의 변화에 따라서 분각하는 기준이 달라 항상 이를 표기했다. 예를 들어 정방형 활자틀을 200개로 나눈것 중 1 조각을 기준으로 하면, ‘200분각’ 혹은 ‘200분의 1각’이라고 한다. 글자사이를 넓히게 되면 20/200 이라고 표기했으며, 때론 금속활자의 크기가 너무 작으면 종이를 끼워 넣어 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가 도래하면서 활자틀을 무한대로 분각할 수 있게 되면서 각 DTP 프로그램은 고유의 분각 시스템을 마련해야 했다. 만약 10pt 크기에서 10,000 분각은 오히려 불필요하게 숫자 인플레이션을 만든다. 그래서 각 디지털 프로그램 회사는 적절한 분각 시스템을 고민했는데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어도비는 천분각(1/1,000unit)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분각은 타이포그래퍼에 따라서 셋팅을 바꿀 수 있게 했다.) 만약 우리가 인디자인에서 -20이라는 글자사이를 값을 입력한다면, 이는 정방형 활자틀을 천분각하여 나눈 조각 20개(-20/1000) 정도의 공간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분각하는 기준은 각 프로그램마다 다르며 대체로 ‘설정’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코딩에서는 글자사이를 100%를 기준으로 조절하기도 하는데 단지 표기하는 척도만 다를 뿐 100%도 100분각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 ‘글자사이’와 ‘특정글자조합글자사이’
글자사이 조절 하는 것을 영어로 레터스페이싱(letter spacing) 혹은 트랙킹(tracking)이라고 부르는데, 트랙킹이라고 부르는 것은 글줄을 일괄적으로 조절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글자사이를 조절할 때는 일괄 선택하여 간격을 일정하게 넓히거나 조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각 글자를 개별적으로 조절할 때 보다 글자꼴 디자이너가 세심하게 정한 글자사이 간격을 해치지 않으면서 일관된 간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속활자 시대에는 ‘글자사이를 넓힌다’라고 했을 때 각 글자사이에 타이포그래퍼가 정한 분각을 집어넣어 조절했을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금속활자에서 ‘글자사이를 좁힌다’라는 것은 어떨까? 지금은 글자사이를 좁히는 것이 가능하지만 금속활자시대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글자가 갖고 있는 글자여백을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이때 글자의 특징 때문에 일정한 글자여백을 갖고 있어도 글자사이가 넓어져 보이는 글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대문자 T와 어센더가 없는 소문자 a, o, e 등이 만날 때 그렇다. 이렇게 특정 글자 조합이 만날 때 생기는 글자사이 문자를 해결하기 위해 금속활자시대에는 ‘컨(kern)’이 있는 활자를 사용하였는데, 컨은 활자면이 활자틀에서 벗어나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말한다. 그러면 뒤에 오는 글자를 끼워 넣었을 때 앞에 오늘 글자에서 튀어나온 컨은 뒷 글자 활자틀 위에 놓인다. 이로써 더 좁은 글자사이를 만들 수 있고, 이렇게 조절하는 것을 커닝(kerning)라고 한다. 다만 컨이 있는 글자를 제작하는 일은 어려워서 컨이 필요한 글자와 특정 글자 조합을 정리하고 관리하였는데, 이를 커닝 글자쌍(kerning pair)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대문자 T와 Y 같은 글자들은 언제나 컨이 있는 글자가 필요했다. 현재는 이런 커닝을 디지털로 입력할 수 있어 글자꼴 디자이너들이 특정한 글자들이 만날 때마나 커닝이 적용되도록 해 더 세밀한 조절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럼 한글에 커닝을 적용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한글을 가로짜기하며 생기는 글자사이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글에는 커닝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 워낙 많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경우 대소문자 52개가 만나는 조합은 52x52이다. 하지만 한글은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만 2360자이기 때문에 이 조합을 모두 고민하면 2360x2360자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현재는 물리적으로 조절은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논문과 최근에는 딥러닝을 이용해서 몇 개의 샘플만으로 디지털 글자꼴 한 벌을 자동으로 제작하는 기술까지 등장하고 있어 한글 커닝에 대한 가능성을 기대해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