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화이트박스 접근이 생존법인가?

(절망편) 하지만 AI는 더 빠르게 발전할 겁니다.

by 타자

원문 참조: AI 시대, 주니어가 대체된다고요?


지난 글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AI가 막힐 때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블랙박스 접근에만 의존한 사람은 AI의 한계가 곧 자신의 한계가 되고, 화이트박스 접근을 유지한 사람은 AI가 헤맬 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쓰고 나서 계속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AI가 언제까지 헤맬까?



전제의 붕괴


희망편의 논리는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었다. AI가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거나, 복잡한 문제 앞에서 헤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펀더멘탈을 갖춘 사람이 그 오류를 잡아내고 교정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AI는 멈춰 있지 않다.


1년 전만 해도 AI가 작성한 코드는 눈에 띄는 결함이 있었다. 6개월 전에는 복잡한 설계에서 허점을 보였다. 지금은? 점점 그 틈이 좁아지고 있다. AI가 실수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실수의 심각도도 낮아지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굳이 검증할 필요가 없는 시점. AI가 선택한 방향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어떤 방향보다 나은 시점.

그때 화이트박스 접근의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How의 종말


냉정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희망 편에서 강조했던 펀더멘탈—자료구조, 알고리즘, 시스템 설계, 네트워크와 운영체제의 동작 원리—이 모든 것은 결국 How의 영역이다.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AI가 완벽해지면 How는 commodity가 된다. 누가 하든 같은 품질, 같은 속도, 같은 결과.

마치 전기처럼.

우리는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몰라도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개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시니어 개발자가 십수년간 쌓아온 설계 감각, 수많은 실패에서 체득한 패턴 인식 능력, 코드 한 줄에 담긴 맥락을 읽어내는 눈. 이 모든 것이 AI 모델의 파라미터 어딘가에 이미 압축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것보다 정확하고 빠르다면, 우리가 쌓아온 것들의 시장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

불편하지만 답은 명확하다. 0에 수렴한다.


What의 시대


How가 의미를 잃으면 남는 것은 What이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 왜 이것이 필요한가.


그런데 여기서 진짜 절망적인 지점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는 말했다. "고객에게 물었다면 더 빠른 말을 원한다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원했지만, 자동차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내놓기 전까지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What의 시대에 살아남는 사람은 이 숨겨진 욕망을 읽어내는 사람일 것이다. 사용자가 말하지 않은 것, 어쩌면 사용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것을 통찰해 내는 사람. 그리고 이 능력은 자료구조를 공부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알고리즘 문제를 푼다고 길러지지도 않는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다. 공감이고, 관찰이고, 심리에 대한 감각이다. 기술 교육과정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다.


정체성의 위기


우리는 구현자로 훈련받았다.

요구사항을 받으면 설계하고, 설계를 코드로 옮기고, 코드를 테스트하고 배포한다. 이 과정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개발자의 정체성이었다. 더 효율적인 알고리즘, 더 우아한 설계, 더 견고한 아키텍처. How에서의 탁월함이 우리의 가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말한다. 이제 해석자가 되라고.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정의하는 사람이 되라고.


어떤 사람들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이야기한다. AI에게 질문을 잘 던지는 기술이 새로운 역량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결국 How다. "어떻게 시킬 것인가"는 "무엇을 시킬지 아는 것"의 하위 문제일 뿐이다. 프롬프트를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도, 애초에 잘못된 것을 요청하면 잘못된 결과가 나온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구현자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온 사람이, 해석자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전환에 필요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는 하는가?


적응, 그 불가피한 것


희망 편을 쓸 때 나는 어딘가 안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펀더멘탈을 쌓으면 된다, 화이트박스 접근을 유지하면 된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의 연장선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절망 편을 쓰면서 그 안심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AI가 How를 완전히 대체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그것이 5년 후인지 10년 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향은 명확하다. 그때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째, 새로운 역량을 정의하고 그것을 쌓는다. 인간에 대한 이해, 숨겨진 욕망을 읽는 눈,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힘. 기술 바깥에 있던 것들이 기술인의 핵심 역량이 되는 역설을 받아들인다.


둘째, 낙오된다.


희망편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하는가? "AI가 모든 답을 줄 수 있는 시대, 남는 건 질문하는 인간뿐이다."


지금은 이렇게 고쳐 쓰고 싶다.


AI가 모든 How를 해결하는 시대, 남는 건 What을 정의할 수 있는 인간뿐이다.


What을 정의하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갈고닦은 것과는 전혀 다른 역량이다. 지금부터 단련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늦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적응해야 할 것이다.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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