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철학, 그리고 전문성
전문가란 단순히 어떤 분야의 전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분야의 철학이 자신의 삶 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세계관으로 작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단지 무언가를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은 전문가라기보다 기능인에 더 가깝다. 진짜 전문가는 오랜 시간 동안 자기 분야의 본질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그 질문 끝에서 마침내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단지 기술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기술이 놓인 자리와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자기 분야를 통해 시대를 읽고, 다시 그 해석을 작업과 실천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전문성은 하나의 삶이 된다.
나는 우리 사회에 이런 의미의 전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사람, 주어진 기준에 맞춰 성과를 내는 사람, 실무를 능숙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기 분야를 오래 살아내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세운 사람은 드물다. 겉으로는 전문가가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능인이 많은 사회에 더 가깝다. 기능은 방법을 익히는 일이고, 전문성은 세계를 보는 눈을 축적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
기능과 기술은 매우 중요하며, 전문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엔 이견이 없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전문가에게 기능과 기술의 숙달은 당연한 전제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 전제를 곧 완성으로 착각한다는 데 있다.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 최신의 방법론을 익히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곧 전문성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 분야를 끝까지 사유하기보다, 우선 통용되는 방식과 언어를 익히는 데 집중하게 된다. 숙련된 실무자는 많아지지만, 자기 언어를 가진 전문가는 줄어든다.
진짜 전문가는 자기 분야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다.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어디까지가 본질이고 어디부터가 타협인지, 이 일이 시대와 세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끝까지 생각해 본 사람이다. 그는 유행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분야를 통해 시대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을 다시 작업과 실천으로 풀어낸다. 그러므로 전문성이란 정보의 양이나 경력의 길이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과 판단, 그리고 그 분야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다시 조직해 온 방식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전문성이란 기술의 축적이 아니라 세계관의 적립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깊이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늘 빠른 증명을 요구한다. 얼마나 빨리 성과를 냈는가,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었는가, 지금 당장 얼마나 쓸모가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시간, 실패할 수도 있는 시간, 겉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을 두껍게 만드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진짜 깊이는 와인처럼 그런 느린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낭만과 집착, 미감과 사유, 반복과 몰입은 대개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들이 한 분야를 문명으로 만든다.
이 점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는 기능은 넘치는데 전문성은 얕은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능하다. 그러나 유능함이 곧 깊이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분야를 삶으로 살아내기보다 생존의 기술로 다루게 된다. 그 결과 지식은 깊이를 축적하지 못한 채 유행을 타고, 심지어 본래의 의미를 잃은 채 변질되기도 한다. 무엇이든 일시적으로 뜨고, 빠르게 복제되고, 쉽게 소모된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문가라는 명칭 자체도 점점 가벼워진다. 예전 같으면 오랜 시간과 사유의 무게를 전제했을 말이, 이제는 단지 경력과 숙련을 가리키는 말처럼 쓰인다. 그래서 전문가라는 이름이 더 이상 충분한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몇몇 개인의 태도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사회 전체가 성과를 바라보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결과를 사랑하지만, 결과를 낳는 긴 시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성과를 원하지만, 성과의 근원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한다. 누군가 낭만과 집착으로 길을 뚫어놓으면 그때부터 관심이 몰린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함께 견디고 밀어주는 문화는 약하다. 그러니 어떤 분야든 기초는 늘 빈약할 수밖에 없다. 몇몇 사람이 거의 자기 소모에 가까운 방식으로 길을 열고, 사회는 그 성공 위에 뒤늦게 올라탄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는 겉으로는 화려해도 속이 얇다. 조금만 흔들려도 쉽게 균열이 드러난다.
여기서 자본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본가들이 진정해야 할 사회적 역할은 가능성에 대한 투자와 그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사회는 투자보다 나눔을 더 강요하며 그렇기에 자본가들도 가능성에 대한 투자보다는 보여주기식 나눔에 더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나누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보다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한 투자와 그 리스크를 감당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교육 역시 이 구조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사람을 무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우 영리하게 만든다. 다만 그 영리함은 오래 붙들고 생각하는 힘보다는 빠르게 분류하고 추론하고 정답을 찾는 능력 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다 보니 지식은 많아도 철학은 얕고, 정보는 넘쳐도 자기 세계는 빈약해진다.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보다 어떻게 빨리 해낼 것인가가 우선이 되면, 사람은 유능해질 수는 있어도 자기 분야를 끝까지 살아내는 전문가로 성장하기는 어렵다. 결국 기능은 발달하지만, 전문성은 자라지 못한다.
전문가란 단순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 분야를 오래 통과하며 자기 감각과 기준, 그리고 세계를 읽는 방식을 축적한 사람이다. 그에게 일은 직무가 아니라 삶의 형식이 된다. 그는 자기 분야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해석한 방식으로 다시 자기 분야를 바꾼다. 그러므로 전문가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의될 수 없다. 오히려 기능을 넘어 그 분야의 철학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작동하는 사람, 즉 기술을 삶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 해야 한다.
결국 전문성이란 단순한 숙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문제다. 기술과 기능의 영역을 낭만으로 시작해 철학으로 완성하는 삶, 바로 그것이 전문가의 형식이다. 자기 분야를 단지 직업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다시 세계에 응답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전문가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지금 더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기능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느린 시간에 대한 존중, 사유의 깊이에 대한 신뢰, 아직 증명되지 않았더라도 끝까지 붙들어볼 수 있는 낭만의 토양이다. 그런 토양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의 사회를 넘어 진짜 전문성의 사회로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