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인간의 전성기가 저무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선배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많아지면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고 말하곤 한다. 예전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인생이 진짜로 끝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내가 나로 살던 중요한 방식 하나가 끝났다는 뜻에 더 가깝다.
사람이 가진 정체성은 생각보다 여러 겹이다. 일하는 나, 가족 안의 나, 친구들 사이의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나. 나이가 들수록 그중에서 가장 강하게 죽는 건 이성(異性)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걸 인정하기 싫어한다. 쿨한 척하거나, 다른 말로 바꾸거나, 별거 아닌 척한다. 그런데 막상 그게 꺼지는 순간이 오면 안다. 그 정체성은 생각보다 내 삶을 많이 떠받치고 있던 기둥이었다는 걸.
이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단지 연애나 섹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 내가 아직 선택될 수 있다는 감각, 내가 여전히 매력이라는 힘을 갖고 있다는 감각. 그게 사람을 살게 하는 면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활력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이유처럼 붙어 있기도 하다.
그 전성기가 저문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사람은 좌절한다. 단순히 무언가를 잃는 게 아니라, 그동안 그 역할로 유지되던 ‘나’의 매력적인 형상이 무너지는 일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픈 건 늙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이성으로서의 내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를 지탱하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 꺼질 때, 마음은 아주 현실적으로 흔들린다.
더 잔인한 건, 그 변화가 한 번에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천천히 온다. 어느 날 사진 속 내가 낯설고, 어느 날은 누군가의 관심이 예전만큼 나를 붙들지 못하고, 어느 날은 내가 스스로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다가 어느 날은 확실해진다. 이제는 이성으로서의 내가 전처럼 나를 밀어주지 않는다. 그게 선배들이 말한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는 말의 진짜 정체에 가깝다.
하지만 선배들은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한다. 이성으로서의 내가 죽은 자리에, 다른 정체성이 들어오면서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오히려 이성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더 온전해지는 시기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전환을, 몸이 앞에 서던 시기에서 사람이 앞에 서는 시기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앞에 서던 시기에는 몸의 상태가 마음을 곧장 흔든다. 오늘 컨디션이 좋으면 세상이 쉬워 보이고, 조금만 무너지면 자신감도 같이 무너진다. 회복이 빠르고, 반응이 빠르고, 보상도 빠르다. 그래서 삶이 상대적으로 가볍게 굴러간다. 그런데 이성으로서의 정체성이 꺼지기 시작하면, 그 가벼움이 사라진다. 몸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앞에 서야 한다. 말과 태도, 선택의 기준 같은 것들. 결국 ‘나’라는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다.
문제는 이 전환이 알아서 잘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몸이 앞에 서던 때에는 주변 반응이 많다. 관심도, 평가도, 선택도 비교적 쉽게 오고 간다. 그런데 그게 줄어들면 마음이 먼저 허전해진다. 그러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동안은 누군가의 반응이 나를 어느 정도 떠받치고 있었다는 걸.
그때부터는 스스로를 스스로 세워야 한다. 누가 나를 증명해주지 않으니까, 내가 나를 설득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무엇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같은 질문을 내가 직접 책임져야 한다.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그 시기에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 같다.
이때 현명한 사람은 이미 저물어버린 이성의 자리에 매달리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깊이에 집중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거창한 업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이 더 정확해지고, 관계가 더 단단해지고, 취향이 더 선명해지는 것도 가치다. 누구를 만나야 편한지, 무엇을 하면 마음이 망가지는지, 어떤 것 앞에서 내가 비겁해지는지 같은 걸 알게 되는 것도 가치다. 젊을 때는 가능성이 많아서 오히려 선택이 흐릿할 때가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선택의 기준이 생기고 그 기준이 결국 사람의 얼굴이 된다.
반대로 그 간극을 견디지 못하면 사람은 자꾸 예전의 자신에게 붙잡힌다. 그 시절의 내가 더 예뻤고, 더 가벼웠고, 더 쉽게 사랑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이 나를 위로할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현재를 갉아먹기도 한다. “그때만이 진짜 나였다”라는 생각이 시작되면, 지금의 나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삶이 계속 임시가 되고, 임시는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결국 몸이 저문 게 아니라,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몸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흐른다. 어떤 노력으로 늦출 수는 있어도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이성적 매력은 유한하고 절대적이라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이성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반면 사람의 시간은 조금 다르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 단단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 여유로워지고, 어떤 사람은 더 깊어진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쌓이는 방식은 다르다.
유한하고 절대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인생은 계속 잃는 이야기로 보인다. 반대로 무한하고 상대적인 것에 집중하면 인생은 다른 방식으로 넓어지는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그 차이를 조금씩 체감한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것이 삶의 중심이던 시절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삶의 중심이 되는 쪽으로.
예전의 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예전의 나를 내 인생의 전부로 만들지 않는 것. 선배들이 말한 “끝난 것 같았다”는 말은 아마 그 전부가 흔들린 느낌을 말하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건,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전환의 한가운데 있다. 가끔은 흔들리고, 가끔은 담담하고, 가끔은 괜히 서운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성으로서의 전성기가 저무는 건 내 인생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중심이 바뀌는 일이라는 것. 이제는 사람으로서의 깊이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 아마 그게,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라는 뜻일 거다.
아쉽지만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생물학적 시간은 절대에 가깝고, 인문학적 시간은 상대에 가깝다. 지나간 것은 그대로 두고, 이제부터는 사람으로서의 깊이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