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리뷰 <앙리 마티스, LOVE & JAZZ>
흰 바탕에 두툼한 검정 선. 작품의 매체는 담백하지만, 선은 인물의 개성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두 작품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이다. 그의 드로잉 작품은 현대에 와서도 사랑받으며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제품에 스며들었다. 에코백부터 액자, 달력, 노트, 컵, 그립톡에까지 진출하며 ‘감성’이라는 키워드로 일상용품 디자인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마티스는 20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지만, 그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편안하고 트렌디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두 작품과 같은 드로잉 스타일은 그의 인생 초반부가 아니라 후반에 완성된 것들로, 마티스의 노년기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 앙리 마티스를 배울 때는 주로 야수파라는 사조 안에서 설명이 이루어지곤 했다. 강렬한 대비와 원색적인 색채, 역동적인 운동감을 잘 보여주는 마티스의 ‘춤’, ‘붉은 방’, ’모자 쓴여인’이 그렇다. 그래서 야수파로서의 마티스 작품과 노년기 작품은 척 보기에도 차이가 있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생각도 바뀌고, 예술가라면 작품의 스타일도 달라지겠지만 마티스의 화풍이 전환된 것은 인생의 막바지에 마주한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72세 때 암 수술을 두 차례나 받게 된다. 노년기에 건강이 악화되어 십이지장 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렸던 유화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고민했다. 전처럼 유화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지만 평생 예술을 하며 산다는 삶의 패턴을 깰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가 1941년에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한 수술은 삶을 연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는 여생 동안 예술 인생 제2막을 열게 된다. 그의 노년기 예술 세계를 <앙리 마티스, LOVE & JAZZ>에서 만났다.
<앙리 마티스, LOVE & JAZZ>는 마티스의 서거 70주년을 기념하여 메종 마티스의 후원으로 열린 앙리 마티스 특별전이다. 그렇기에 마티스 직계 후손이 설립한 ‘메종 마티스’의 작가 협업 에디션 (화병, 카펫, 접시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2월 31일까지 CxC 아트 뮤지엄에서 진행한다.
때때로 고통은 인생을 뒤바꿔 놓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 비극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희극이 되기도 한다. 마티스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 그런 느낌이 든다.
암 판정 이후 여러 수술을 받게 되면서 그의 작품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마티스의 나이 72세 때의 일이다. 수술을 했지만 몸은 지속하여 아팠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면서 끝까지 지켜낸 것은 작품활동이었다. 죽기 전날까지도 네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니 지켜냈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는 예술 활동을 숨 쉬듯 지속했다. 그만큼 마티스에게 예술과 창작은 의식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삶의 부분이었다.
폐색전증도 앓았기에 유화로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에게 수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예술을 한다는 목적 하나를 위해서 다른 수단을 고려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컷아웃(CUT-OUT) 기법이다.
컷아웃 기법은 말 그대로 오려서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CUT OUT 작품 <블루 누드>, <이카루스> 등을 보면 캔버스 위에 오린 색종이가 붙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색종이가 없었기에 직접 만들어야 했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색을 입혔고 그것을 오렸다. 원하는 색을 뽑기 위해 여러 가지 색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컷아웃은 색채를 직접 만들어 원하는 모양으로 오리고 그것을 정교하게 배치하는 작업이다.
“가위는 연필이나 차콜로 선을 그리는 것보다 더 감각적이다. 색채를 곧장 잘라나가는 것은 조각가가 석재를 가지고 하는 일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 섹션 ‘재즈’에서는 마티스가 컷아웃을 이용해 만들었던 작품들이 등장한다. 코발트 색 벽면에 노란색 별이 반짝이는 전시장 벽면은 <이카루스> 배경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 강렬한 배경에서도 그의 컷아웃 작품들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유난히 그의 그림에는 해초가 많이 보인다. 고불고불한 모양의 해초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등으로 경쾌하게 묘사되어 있다. 캔버스 위에서 해초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마티스는 암 수술을 두 번 겪고 나서 타히티섬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와 해초와 같은 섬의 풍경을 보며 휴식기를 가졌다. 그에게 바다의 푸른색, 해초는 치유 혹은 생명과 같은 긍정적인 상징을 뜻하는 것으로 노년기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JAZZ BOOK에 속한 작품들은 재밌는 것들이 많다. 따로 설명을 듣지 않고 작품만 유심히 살펴보아도 무엇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서커스>, <말, 곡마사, 그리고 광대>처럼 역동감이 넘치는 작품도 있고, <마음>, <운명>, <형상들>처럼 추상적인 작품도 있다.
JAZZ BOOK에 엮인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은 무척 독특할 뿐 아니라 계속 보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형태와 색감, 투박한 선처리는 캔버스 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하나의 조각이라도 위치가 조금이라도 뒤틀렸다면 이런 느낌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장은 마티스의 어록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꽃을 보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꽃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니까. 위 문장은 예술과 삶에 대해 동심과 긍정을 잃지 않던 그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보는 사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삶의 그늘보다는 햇살을, 비유보다는 직관으로 작품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을까. 생의 고단함을 씻어낼 수 있는 그림, 때가 묻지 않은 무구한 그림, 안락의자 같은 편안한 그림은 그가 바라고 추구하는 예술관이었다.
그의 삽화를 보고 있으면, 어린아이의 동심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줄이 없는 노트북을 북 찢어 그 위에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 글만 쓰기에는 허전해서 색연필로 꽃이나 나뭇잎, 하트를 그려 넣던 추억이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 번째 섹션 ‘마티스와 사랑의 시’에 등장하는 드로잉과 삽화들은 그가 병상에서 작업했던 것들이다. 몸이 안 좋아 오랫동안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우니 빠르게 눈을 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드로잉 스킬을 길렀다. 그리고 그는 롱사르, 샤를 도를레앙 등 프랑스의 유명한 서정시인들의 사랑시를 기반으로 시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작업했다. 그 마음은 드로잉과 삽화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연필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한 드로잉은 소박하지만 멋스럽고, 간결하지만 아름답다. 배경에 작은 꽃을 그려 넣거나 반짝이는 빛처럼 보이는 무늬를 넣은 것도 있다. 장식적인 요소가 더해지니 삽화의 사랑스러움은 배가 된다.
“나는 푹신한 안락의자처럼 육신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예술을 하고자 한다.”
그의 삽화를 보고 있으면, 어린아이의 동심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줄이 없는 노트북을 북 찢어 그 위에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때, 글만 쓰기에는 허전해서 색연필로 꽃이나 나뭇잎, 하트를 그려넣던 추억이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 번째 섹션 ‘마티스와 사랑의 시’에 등장하는 드로잉과 삽화들은 그가 병상에서 작업했던 것들이다. 몸이 안좋아 오랫동안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우니 빠르게 눈을 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드로잉 스킬을 길렀다. 그리고 그는 롱사르, 샤를 도를레앙 등 프랑스의 유명한 서정시인들의 사랑시를 기반으로 시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작업했다.
눈으로 생각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전시장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역시 거장은 생각조차 다르구나'하며 감탄했다. 나는 보통 글로 생각하고, 생각을 다른 표현 수단으로 옮긴다. 아마 이 과정을 ‘그림을 그린다’라고 할 것이다. 그럼 마티스는 글 대신 이미지로만 생각했다는 것일까?
이미지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가 본 경험이 적기도 하지만 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 생각은 음성으로서 머리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진다. 그러다 두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눈으로 생각한다는 마티스의 말을 확 이해하게 됐다. <운명>과 <마음>이다.
두 작품을 보았을 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해 받았다.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을 말로 형용하면 처음의 느낌이 손상될 것 같은 정도였다.
분할된 두 화면 속 작품은 연결되어 시간의 흐름대로 읽히기도 하고, 각각 동시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운명>은 작품에 연속적인 시간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마음>은 반대로 누군가의 몸통처럼 보였다. 특히 <운명>의 색감과 형태는 정말 절묘하다. 기억에 남는 두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마티스의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섹션은 전체적인 연관성이나 주제에 빗대어 봤을 때 공간과 콘텐츠가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원본을 재현한 포토월이나 작품을 재창조한 미디어아트, 메종 마티스 섹션 등은 앙리 마티스 서거 70주년 기념전이라고 불리기에는 기념보다는 너무 많은 콘텐츠를 담아낸 느낌이었다.
섹션 4는 본 전시가 메종 마티스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만큼 쨍한 오렌지 컬러로 존재감이 분명했다. 메종 마티스의 한정판 에디션인 화병이나 카펫 등은 예술작품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아름답고 독특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고 접시나 식기류도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톡톡 튀는 디자인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섹션 4의 화려한 색감은 섹션 2와 보색대비를 이루면서 전시에서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느껴졌고 감상의 맥이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전시의 흐름이다. 섹션 1에서는 마티스의 생애와 드로잉이, 2에서는 컷아웃 작품과 아트북이, 3에서는 책에 실렸던 삽화들이 나왔고 4에서는 메종 마티스의 한정판 에디션이, 5에서는 <붉은 방>, <붉은 화실>, <커다란 붉은 실내>가 4면을 채우는 미디어 아트가, 6에서는 로사리오 성당의 제작 스토리와 참고용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흐름이 아쉬웠던 이유는 각 섹션의 구성에 따른 작품의 임팩트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터 앙리 마티스의 방처럼 꾸며놓은 포토존이 나오고, 그 다음 구역에서는 그의 연대기와 드로잉 작품이 나온다. 그의 드로잉 작품은 위치 상 조금 더 강조될 수 있는 구역과 흐름에 놓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마티스의 방은 섹션 2 이후에, 드로잉 작품은 초반부에 삽화와 같이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맘에 들었던 것은 섹션 2의 JAZZ다. 벽이 화려했지만, 작품이 눈에 잘 띄었고 공간 구획도 감상하기 좋게 되어 있었다. 작품의 제목을 그림의 아래가 아닌 옆면에 몰아놓은 구성도 좋았다. 마티스가 다른 사람들과 작업한 아트북에 대한 설명 또한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 다음 섹션에서 나왔던 삽화 파트는 베이비 핑크 색상의 벽이 삽화를 감상하기 좋은 배경이 되었지만, 앞선 1-2 관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 때문에 흐름 상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또 그의 대형 컷 아웃 작품인 <가면이 있는 대형 장식>은 포토월이라 하기에는 색감이나 해상도가 모두 아쉬웠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섹션 로사리오 성당을 재현한 구역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섹션은 전시장과 건물이 연결된 여분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한쪽 벽면 위가 오픈되어 있었기 때문에 쇼핑 센터의 소음이 그대로 들어와 어수선했다. 그렇다보니 활자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곳은 복도로서의 느낌이 강했다. 한쪽은 로사리오 성당의 사진이, 한쪽은 그가 로사리오 성당을 작업하게 된 스토리가 적혀있었지만 전시의 마무리로는 적합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아쉬움 반, 만족스러운 마음 반으로 두 가지 마음을 저울질했다. 그래도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을 보고 그의 예술 세계와 그 외 작품들,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더욱 궁금증이 생겼다. 감각적인 그의 컷아웃 작품은 한동안 머릿속을 떠돌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