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에 관한 작은 책,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 저/노윤기 역 | 페이지2북스 | 2024년 0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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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않으면, 결국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휘둘리며 살게 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깨닫게 하는 문장입니다. 에픽테토스는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삶의 주도권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결국, 우리는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스스로에게 충실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이 책은 깊이 일깨워줍니다.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서기 55년경 로마 동쪽의 변경 지방인 히에리폴리스에서 태어나 노예 신분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한쪽 다리를 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다는 설도 있고 주인에게 구타를 당해 다리가 부러져 불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노예임에도 당대 최고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알려진 무소니우스 루푸스에게 철학을 배웠고, 이후 지유인으로 해방되었다.해방된 후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서기 93년경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철학자 추방령을 발표하자 니코폴리스로 건너가 학교를 세웠다.
에픽테토스는 그곳에서 서기 135년경 생을 마감할 때까지 철학을 가르쳤다. 에픽테토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제자 아리아노스가 그의 강의를 받아 적어 책으로 펴냈다.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이 니코폴리스를 찾았으며, 그 명성은 당시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의 초청을 받을 만큼 높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스토아 철학자인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저작 『명상록』에서 에픽테토스를 여러 번 언급 한다.
한때 노예였던 사람의 철학이 로마 황제의 생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에픽테토스의 사상과 말이 얼마나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에픽테토스는 늘 ‘자유와 노예’를 자신의 철학적 주제로 삼았다. 그가 말하는 자유와 노예는 각자가 속한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정신적 지위이자 태도에 대한 비유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인 신분의 인물을 ‘노예’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지혜로운 자만이 자유롭다’는 스토아의 정신올 드러내는 표현이다.
“노예로 태어났어도 실패가 아니다. 절름발이가 되어도 망하지 않았다.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으며한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의 몸이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철학을 갈고닦아니코폴리스에 철학 학교를 세우고 가르침을 전하며수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았다. 황제조차 그에게 가르침을 청할 정도였다. 그는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이후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그가 남긴 스토아 철학을 바탕으로 로마를 통치했다.
“에픽테토스의 말들 중에서가장 시의적절하고 가장 철학적이며 영혼에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말을 엄선한 선집” 에픽테토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나,그의 제자인 아리아노스가스승의 강의와 대화를 받아 적어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의 원제인 『엥케이리디온The Enchiridion』은‘손에 들고 다닐 만한 작은 것’, 즉 핸드북이라는 뜻으로에픽테토스 철학의 정수만을 담은 요약집이다. 또한 손에 쥐는 칼, 또는 단도라는 의미도 있는데이 책이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을 엥케이리디온이라는 제목으로 암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충동과 욕망와 혐오는 자아에 속한 것이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만, 질병과 부와 명예는 자아에 속한 것이 아니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에 자유와 환희와 충만함을 느끼고,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불안과 억압과 위태로움을 느낀다.그래서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것, 즉 타인에 귀속된 것을 당신의 소유로 삼고자 한다면 갈등과 분란과 고통이 초래될 뿐이다.
결국 당신은 신과 인간들을 책망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당신이 자신에게 속한 것에 만족하고 타인에게 속한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거나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또한 타인을 비판하거나 정죄할 일이 없을 것이며 억지로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누구도 당신을 해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당신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 이런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때로는 불필요한 행위를 멈춰야 하고 때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만일 여기 만족하지 않고 부와 권력까지 손에 넣으려 하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자유와 행복 모두를 잃게 된다.
당신은 수긍하기 힘든 세상일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것은 껍데기일 뿐,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야.” 자신의 생각으로 이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점은 당신이 그 일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당신은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충동하는 마음이고 혐오는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피하도록 이끄는 마음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실망스럽고, 싫어하는 대상을 피하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그런데 통제할 수 있는 나쁜 일은 회피하면 그만이지만, 통제할 수 없는 질병과 죽음과 가난은 회피할 방법이 없다.그러므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혐오를 거두고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통제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사람은 좌절할 수밖에 없고, 결국 욕망의 먹잇감이 되어 통제 가능한 것들마저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혐오할 때는 품격과 분별, 절제를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전혀 무서운 일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Socrates도 죽음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기실, 공포는 죽음이 무섭다는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과 억압과 슬픔을 마주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시비를 따지기보다 나 자신과 스스로의 관점을 돌아보아야 한다.배움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으로 타인을 비난한다.
배움이 부족한 사람은 불행의 원인으로 자신을 지목한다. 배움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기뻐할 이유가 없다.어떤 말馬이 “나는 멋진 말이야”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당신이 “내 말은 멋있어”라고 자랑한다면, 당신은 말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태도를 지닌다면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충만한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질병은 신체에 장애가 되지만,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한 의지의 장애는 아니다. 절뚝거림은 다리의 장애일 뿐 마음까지 장애로 만들지는 못한다. 세상 모든 일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에게 장애가 되는 일도 당신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잃었다’라고 말하지 마라. 대신 ‘돌아갔다’라고 말하라.자식이 죽었는가? ‘돌아간 것’이다. 배우자가 죽었는가? 그것도 ‘돌아간 것’이다.재물을 빼앗겼는가? 그 또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앗아간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 그 사람이 가진 재물 또한 누군가에게 돌아갈 것이니 당신이 관여할 필요는 없다.무엇을 가지고 있더라도 당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행자가 숙소를 집이라 여기지 않는 것처럼.
배우자와 자녀와 친구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욕망일 뿐이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하려 하고,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일을 자신의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에게 완벽함을 바란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미망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흠결이 흠결 아닌 것이 되기를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자신의 욕망에 좌절하고 싶지 않다면 자아의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을 행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취하고 싫은 것을 피하는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에게 속한 것을 바라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노예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힘든 일로 고통받거나 자식을 멀리 보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더라도 연민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되뇔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아픈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그 일을 아프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야.”
그와 마주할 때는 아낌없는 위로를 보여야 하며 필요하다면 함께 눈물을 흘려도 좋다. 하지만 마음 깊이 비탄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
당신은 정체 모를 작가가 집필한 연극의 배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극이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연기할 뿐이다. 작가가 당신을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 설정했든, 혹은 귀족이나 왕으로 설정했든 그 역할을 잘 해내면 된다. 배역을 잘 소화하는 일이 당신의 몫이며 배역을 선택하는 일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분란에 개입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사람을 볼 때, 혹은 어떤 업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움츠러들지 말고 그저 ‘행복한 사람이군’이라고 여겨라.
행복은 본질적으로 각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므로 그것을 위해 타인과 경쟁하거나 비교하며 남을 시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군이나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되기보다는 자유를 갈망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관심을 거두는 것이다.
우리가 모욕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욕설이나 폭력이 아니라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을 도발한다고 느낄 때, 실제로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에 받은 인상만으로 속단하여 반응하지 마라.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상황에 대처하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쉬워진다.
“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명예도 없이있는 듯 없는 듯 살게 되겠지요.”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 괴로워하지 마라. 명예가 없는 것이 악이라면 이는 타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얻고 타인과 함께 향락을 누리는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일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권력이 없다는 것이 어떻게 불명예가 되겠는가? 또한 당신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 훌륭히 맡은 바를 해낸다면 어떻게 별 볼 일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그러면 친구들을 도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묻겠다. ‘돕는다’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은 친구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없고 그들을 로마 시민으로 만들 수도 없다. 이런 것이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하던가?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어떻게 타인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부와 권력을 손에 넣으면서로 이익을 볼 수 있잖아요.”
나 자신의 명예와 진심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알려주기 바란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누군가 선하지 않은 것을 얻고자 나의 선한 것을 버리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다소간의 돈을 원하는가, 아니면 충직하고 소중한 친구를 원하는가? 후자를 원한다면, 그 친구가 고귀한 성품을 잃는 일을 하도록 요구하기보다 그 성품을 지키는 일을 돕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당신보다 인기가 많고 칭찬과 인정을 받는가? 그것이 좋은 덕목이라면 그가 좋은 것을 가졌음을 축하하라. 그것이 좋은 덕목이 아니라면 당신이 나쁜 것을 가지지 않았음을 축하하라.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승패를 다투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경기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권력자의 문 앞을 서성이며 시중들고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몫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떤 물건을 사면서 그것이 팔리는 통상 가격을 지불하는 대신 공짜로 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이다.시장에서 상추가 얼마에 팔리고 있는가? 누군가 돈을 지불하고 상추를 가져갔고 당신은 돈을 지불하지 않아 상추를 가져가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그가 당신이 얻지 못한 이익을 취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상추를 가지고 있고 당신은 지불하지 않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했다면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불하는 비용은 아첨이 될 수도 있고 문안 인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이익이 된다면 상대방에게 그에 상응하는 몫을 지불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고 이익만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다.만찬에 참석하지 않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아첨할 필요가 없었고 무례한 측근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의무라는 것은 대체로 관계에 의해 설정된다. 당신에게 아버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보살피고, 여러 지시에 복종하고, 그의 꾸지람을 새겨들어야 한다.아버지가 나쁜 사람인가? 그런데 당신은 좋은 사람이어야만 당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이다.
형이나 아우가 이기적인가? 그저 그와의 합리적인 관계를 설정하라. 그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어떤 태도로 그를 대할지 결정하라.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없다. 그 아픔을 허락할 때만 당신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과 집단과 공동체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와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정해 둔다면 모든 상황에서 처신할 바를 알 수 있다.
신탁을 받기 위해 신관을 찾아갈 때 우리는 어떤 결과를 얻을지 알지 못한다. 단지 신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철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신관을 만나기 전에도 운명의 본질을 알 수 있다.만일 운명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결코 옳고 그름으로 판단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욕망이나 혐오의 감정을 신전에 가져가지 마라.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맡기고자 할 때 우리는 떨면서 신관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에게 무관심하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 일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은 당신의 생각에 달려 있으며 누구도 이를 방해할 수 없다.
신이 당신의 조언자일 뿐이라는 마음을 품고 신관을 찾기 바란다. 그리고 신탁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이를 따르지 않으면 누구를 무시하는 것인지 반추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갈파했듯 이성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했다면 신관을 찾아도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이나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면 이를 묻지 마라.부정적인 신탁이 당신 앞에 놓였다 하더라도 기껏 죽음이나 상처, 혹은 추방이 예고될 뿐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힘을 가졌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와 국가를 지지할 수 있다. 위대한 신탁을 내렸던 아폴론 신도 친구가 죽임을 당할 때 그를 구하지 않은 사람을 신전에서 쫓아냈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만일 쾌락을 즐기는 일에 휩쓸리게 된다고 해도 그것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라. 그런 뒤에 쾌락에 빠져 있을 때의 기분과 쾌락에서 빠져나온 뒤 후회하고 자책할 기분을 떠올려보라.
또한 쾌락의 유혹을 이겨낸 이후의 뿌듯한 마음을 상상해 보라.쾌락을 원하는 마음이 주기적으로 엄습할지라도 그 매혹과 흥분이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인내가 불러오는 더 나은 결과인 위대한 승리의 기쁨을 떠올려보라.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판단했다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저 없이 실행하라. 물론 올바른 일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올바르다면 왜 당신을 부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가?
“지금은 낮 또는 밤이다”라는 명제에서 ‘낮’과 ‘밤’이라는 두 명사 중 하나만 쓰면(“지금은 낮이다” 혹은 “지금은 밤이다”) 지극히 옳지만, 함께 쓰면(“지금은 낮이면서 밤이다”) 모순이 된다.
만찬을 즐길 때, 배불리 먹는 행위는 식욕의 입장에서는 적절하지만 친교라는 사회적 행위의 입장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함께 만찬을 즐길 때 눈앞에 차려진 음식은 살기 위해 먹는다는 의미 외에 주인에게 보이는 예의라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걸을 때 못을 밟거나 발목을 접질리지 않도록 조심하듯,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마음의 중심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긴다면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추론은 논리적이지 않다.“내가 너보다 부유하니 내가 너보다 우월해.”“내가 너보다 말을 잘하니 내가 너보다 우월해.” 논리적인 추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너보다 부유하니 내가 너보다 재산이 많아.”“내가 너보다 말을 잘하니 내가 너보다 호소력이 좋아.”
하지만 당연하게도 당신은 재산이 아니고 호소력도 아니다.
목욕을 급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목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목욕을 빠르게 한다고만 말하라.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말하지 말고 술을 많이 마신다고만 이야기하라.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그 행동이 나쁜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잘 알지 못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 않도록 하라.
자신을 철학자라고 내세우지 말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깨우친 지혜를 설파하려 하지 마라. 다만 행동으로 보여주라. 예를 들어 만찬 자리에 간다면 사람들에게 식사하는 방법을 설득하려 하지 마라. 식사의 도리를 다하면 그뿐이다.
소크라테스도 모든 종류의 과시를 지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자신에게 와서 다른 철학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화내지 않고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당신 또한 무지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논파하기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 다듬어지지 않은 지혜를 급히 던져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을 무지하다고 비난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면 당신이 비로소 철학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믿어도 된다.
양은 먹은 풀을 다시 토해서 자기가 먹은 분량을 목동에게 확인받지 않는다. 음식물은 안에서 소화된 뒤 양털과 젖이 되어 외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당신도 당신의 지혜를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설파하기보다는 그 지혜가 소화되어 나타나는 행동으로 보여주라.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이나 손해가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철학자는 이익이나 손해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을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타인을 탓하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명망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하지도 않는다. 난관에 부딪히고 일을 그르쳐도 자신을 돌아볼 뿐이고, 일에 성공하여 칭송을 받아도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을 뿐이다.
그는 비난을 마주해도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처럼 모든 일에 조심스레 처신한다. 그는 욕망을 절제할 줄 알며, 자신의 의지를 훼방하는 것만을 혐오한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 자신의 의지를 고루 투영하고자 한다. 남들에게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처럼 보여도 개의치 않는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적군 앞에서 몸을 숨긴 매복 군인인 양 자기 자신을 경계한다.
가장 고귀한 성취와 이성의 높은 판단력을 추구하는 일을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가? 이제 당신은 알아야 할 철학적 원칙들을 숙지했다. 그런데 그 원칙들을 발전시키는 행위를 미루고 언제까지 스승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인가?
당신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당신은 한 사람의 성인이다.
게으르고 나태하게 미루고 핑계를 대면서 자기를 통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할 것이며, 죽는 날까지 비루한 마음 외에 어떠한 좋은 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 사람의 원숙한 성인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라. 최선의 것을 당신만의 규칙으로 삼으라. 결코 위반해서는 안 된다. 고통과 쾌락이, 혹은 영광과 치욕이 당신 앞에 드리워져 있는 이 삶 자체가 전투 중인 전쟁터이다.
결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지금이다. 올림픽 경기를 앞둔 선수처럼 당신의 성공과 실패가 단 하루, 단 하나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라.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이성만을 추종했으며 스스로 전방위적으로 채찍질하여 자신을 완성했다. 비록 당신이 소크라테스는 아닐지라도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다음과 같은 격언들을 기억하기 바란다.
나를 인도하소서, 신이여, 운명이여,당신이 정해주는 곳이 어디든원하지 않아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따르겠습니다.
- 클레안테스(Kleanthes),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에서 발췌.
진실로 자신의 운명에 귀의한 자,그대는 현명한 자이며, 하늘의 법칙을 아는 자이니.
- 에우리피데스(Euripides), 『단편(Fragments)』에서 발췌.
오, 크리톤, 나의 죽음이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그대로 따릅시다.
- 플라톤(Plato), 『크리톤(Crito)』에서 발췌.
아니투스Anytus와 멜리투스Melitus가 나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하리라.
- 플라톤(Plato),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