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를(1996년도에 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다닐 때 일이다.
아마 3학년 즈음으로 생각한다. 당시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학생수가 무척 많았다. 그래서 한 반에 오전과 오후 2개 조로 나누어 반을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퇴근하면 오후에 출근하는 이들과 마주하며 천지창조와 같은 아련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한 반에 학생이 50명이 넘는 데다 오전과 오후 학생들 얼굴마저 달라지니 선생님은 미칠 노릇이었음이 분명했다. 선생님은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대부분 이름대신 번호나 외향적 특징으로만 부르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숫기도 없고 혈액형 또한 A라(당시에는 혈액형이 A라면 내성적 인간으로 분류되던 때였다) 손을 들고 의사 발언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인원수 체크를 위해 차례로 숫자를 말하며 넘어가는 것조차 땅을 보며 말했을 정도였으니. 나에게 발표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들 손으로 빼곡히 재워진 교실 풍경을 감상하며 혼자 큭큭대며 웃었다. 어떤 아이는 답도 모르면서 손부터 올려대던 AB형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당시 AB형은 괴짜의 상징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발표를 시켰다. 손도 들지 않던 나를 지목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지만 가만히 있었다. 당연히 내 뒤에 있는 친구겠거니 했다. 태연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선생님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셨다.
“저요?”
“그래 너!”
주변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손을 들었음에도 발표를 하지 못한 아이들에게서 작은 아쉬움이 묻어난 탄식이 쏟아졌다. 일단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질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모두 나만 볼 것이라는 불안을 뒤로한 채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나무로 된 교실 마룻바닥에 의자가 끌리며 나는 소리마저 불안했다. 끼이~익, 나는 그저 서있었다. 마치 얼음땡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정지화면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몇 초가 1주일처럼 느껴졌다. 모르면 모른다라고 케라, 절마 저거 모르네 같은 숙덕임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결국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째려보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보다, 나에게 발표를 시킨 선생님에 대한 의문이 원망으로 번져갔다. 왜 나를 시킨 걸까.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 다음 날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모두가 우연을 넘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결국 회피할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발표자 물색을 위해 쓱 보는 순간에 연필을 책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그렇게 아무개 이름이 불릴 때까지 책상 밑에서 아이들의 발냄새를 맡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적재적소에 연필만 떨어뜨린다면 발표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느 날, 방과 후 남아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책상에 걸상을 뒤집어 올리고 한쪽으로 밀어낸 다음 한참을 쓸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나타났다. 청소 다 하고 혼자 남아 있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쓱 사라지셨다. 친구들은 내가 또 사고 쳤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고, 나는 발표시간만 되는 연필을 떨어뜨리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걸렸구나’ 혼자 중얼이며 과거 행동에 대한 후회를 만끽하며 마음껏 불안해했다.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으며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인지 위장 한쪽이 콕콕 쑤셔왔다.
청소를 마친 친구들은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교실 구석에 자리 잡은 선생님 책상 옆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떠나는 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가는 이들은 내가 기둥에 묶인 강아지처럼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국딩스러운 짖꿎은 몸짓은 빼먹지 않았다. 그런 장난을 하며 마음속 불안을 조금씩 몰아낼 수 있었다. 텅 빈 교실에 혼자 30분을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시도를 했다. 왜 나는 발표를 못했던 걸까, 하필 그때만 되면 연필을 굴려 떨어뜨려야 했는지에 대한 반성을 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고개를 빼꼼 내미셨다.
“다 간 거 맞지?”
“네 선생님…”
나는 이미 반성하다 지친 사람처럼 말끝을 흐렸다. 겨우 붙잡아 두었던 불안감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얼굴에 나타날까 봐 좌불안석하던 사이, 어느새 선생님은 내 옆으로 와 계셨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캔음료를 하나를 내미셨다. 오렌지 알겡이가 쌕쌕 터지는 음료였다. 나는 두 손으로 넙죽 받고는 갈증을 못 이기던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벌컥벌컥 마셔댔다. 선생님은 마시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시더니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셨다.
“요즘 어머니 뭐 하셔, 바쁘시니?”
“엄마는 그냥 집에 잘 계시는데요”
“아, 난 또 일이 있으신가 했지”
“오늘 선생님이 물어봤다고 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가끔 학교에 오신 적은 있었다. 주부라는 사실을 숨기시고 싶으셨던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옷을 맞춰 입고서 삐딱 구두를 신고 오셨지. 재미있는 사실은 학교 방문 자체를 줄곧 숨기셨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우리 어머니가 어제 다녀가셨다고 넌지시 귀띔해 주고 나서야 알았던 적도 있었다. 나는 의아했지만 내가 성적이 떨어지고 있어서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 가서도 함구했다. 괜히 물어보면 성적이야기가 다시 나올 수 있었으니까. 집에서도 손을 들고 먼저 말하지 않았고,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 아이로 있었던 것 같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30대 중반을 앞둔 어느 추석 연휴 오후, 엄마는 전을 부치시며 문득 나의 과거 이야기를 하셨다. 늘 하시던 잔소리나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날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가 생각하는 인간의 기준은 직장을 가져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나 없는가에 있었고 나는 자리를 잡아서 돈을 잘 벌던 시기였다. 나는 그때 잔소리 종식을 기원하며 월급으로 TV를 사드렸었다.
“저 인간 언제 인간 되나 했는데, 취업해서 돈도 다 벌고. 너 인간 만들어 보려고 국민학교 때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말 안 했니?”
“3학년 때 너희 담임선생님한테 돈을 많이 드렸어”
“그 말로만 듣던 촌지를 드렸다고요?”
“응 오렌지가 쌕쌕 씹히는 음료 박스에다가 돈봉투를 몇 번이고 넣어 드렸지”
나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20년간 의문으로 남아있던, 나만 알고 있어야 했던 ‘엄마 바쁘시나?’ 사태가 드디어 기억났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져서인지 괜히 소름이 돋았다. 그간 의문과 추측으로 얼룩진 미완의 과거가 드디어 드러난 것이었다. 나는 대뜸 엄마를 나무랐다.
“엄마 진짜 왜 그랬어요? 그때 선생님이 발표를 하도 시키셔서, 발표시킬 때만 되면 연필을 굴려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줍는 척했어요”
“발표가 그렇게 하기 싫던?”
“네 무척이요”
우리는 한참 동안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그때의 기억에 젖어 있었다. 그날 마셨던 캔음료마저 엄마가 샀던 것이었다니. 약간의 소름과 황당함, 그리고 노골적이면서도 소심했던 선생님의 요구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생 때 어떤 사유로 징계를 받았고 교직을 떠났다는 말을 다른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다. 나는 왠지 그 사유라는 것을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