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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

by 눈 비 그리고 바람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에서 초등학교 학생 5명이 와룡산으로 도룡용 알을 주으러 나갔다가 그날로 모두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 그 뉴스를 접했을 때 별일 아닐 줄 알았다. 5명이나 되는 데다 그중에는 고학년도 있었기에 산 중턱 어딘가 아지트라 불리는 곳에 숨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흘, 나흘이 되도록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군대, 경찰, 민간 합동 수색대가 뛰어들어 샅샅이 뒤졌지만 별다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개구리 소년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며칠째 계속되는 수색에도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저녁식사 후, 우리 가족 넷은 소파를 등받이 삼아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로 저녁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날도 비통한 뉴스로 마무리될 것임을 앵커의 눈물을 보고 알았다. 서로 애통해하면서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훌쩍이는 소리는 앵커만 내는 소리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자료 화면으로 나오던 와룡산 초입에 산자락은 낯익은 곳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외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앉아 가봤던 곳이기도 했으니까.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사건인 만큼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실종된 아이들은 나와 연령대도 비슷했다. 그때까지는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다음날. 등굣길, 집을 나서면서 엄마의 잔소리는 현관 나설 때까지 등뒤를 따라왔다. 모르는 사람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학교 수업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와야 한다고 몇 번씩이나 일러주었다. 아파트 옆에 위치한 쪽문을 지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불현듯 짜증이 밀려왔다. 길가를 굴러다니던 솔방울을 힘껏 찼다. 빗맞은 솔방울은 몇 발자국 앞에 툭하고 떨어졌다. 분은 풀리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아이들 여기저기 모여서는 숙덕이기 바빴다. 선생님은 가정통신문이나 유인물을 만들어 우리 편으로 전달하겠으니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 하셨다. 그 내용인즉슨 방과 후에도 강이나 산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집 밖으로 보내지 말라는 충격적인 글도 있었다. 그날도 종례를 위해 아이들은 반에 모여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그래, 느그들, 절대로 산에 가지마래이”

“개구리 소년…”

“아직도 못 찾았다 아니가”

“네”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창밖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정지된 시간 동안 그들에 대한 애도와 묵념을 하는 사람처럼. 실종이 암묵적인 죽음이라는 것에 동의하듯 귀가 먹먹할 듯한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반 아이들도 그때만큼은 선생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마치 실종된 그들을 같은 반 친구들이라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각자의 가정에서 가장 귀엽고 방정맞아야 할 아이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그렇게 종례가 끝나고 모두는 침울해 있었다. 친한 친구 패거리 중 종원이가 도랑에 가자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짜 안갈끼가?”

“머가?”

“도랑에 말이다”

“니 도랐나, 선생님이랑 말씀 못 들었나?”

“나는 집에 가면 못나올끼다, 느그끼리 가라”

“그럼 내 혼자라도 가서 놀아야겠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랑에서 친구들과 놀던 때를 상상했다. 같이 협동으로 물고기를 잡았을 때 전해오는 묵직한 손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거의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빠져있었다. 놀이터에서 모래를 파던 아이가 생물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놀이터는 시시한 곳으로 전락하고 만다. 잡았을 때의 손맛도 짜릿하고, 잡은 것들은 전리품으로 가져올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 실제로 쏘가리 같은 민물고기를 잡아오면 엄마는 매운탕을 끓여주시곤 하셨다 – 개구리 소년도 진귀한 생물을 따라 깊숙한 산속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빵부스러기를 남기지 않아 길을 잃은듯한 그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엄마가 없으면 잠시만 다녀올까? 깊은 산으로 안 가면 되니까 괜찮지 않을까? 가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핑계를 모두 모으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가방을 던지고 엄마를 찾았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지만 엄마는 없었다. 카레가 넘치도록 들어찬 솥에 아직 김이 나고 있었고, 소분되어 담겨 있는 큰 접시가 두어 개 보였다. 엄마는 가마솥 같이 큰 솥에 카레를 끓이시고는 이웃집에 나눠주러 가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면 ‘몇 호에 이것 좀 주고 금방 올게’ 하시면서 나갔다가 단 한 번도 금방 온 적이 없었다. 저녁시간이 다 되도록 안 오신 적도 있어서 아빠의 사주를 받고 찾으러 나간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반사적으로 ‘아싸’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서둘러 도랑으로 뛰었다. 도랑 앞 공터에는 제정신이냐며 반색했던 정원이가 끌고 나온 자전거가 주차되어 있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갑자기 손끝에서 시작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간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은 친구 3명이 모이고 나서야 안도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들이 친구보다는 들끓는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다. 그렇게 개구리 소년과 어른 말을 얕잡아 보던 삼인조는 결의를 다시며 도랑에 모이고 말았다.


“근데 오늘 도랑에 아무도 없노, 이상하다”

“개구리 소년 때문에 그렇다 아니가”

“우리도 걸리면 죽는 거 아니가?”

“개안타, 겁쟁이가? 안 걸리면 되지”

“걸려도 종원이 니가 오자 했으니 니가 책임지라”

“머라카노 다 공범이지”

“대신 딱 한 마리만 잡고 집에 가는기다”


서로는 서로를 볼모로 잡았고, 한 마리라는 말에 위안을 삼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놀았다. 딱 한 마리 라던 말은 핑계일 뿐이고, 흐르는 시간은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셋이서 함께 놀았다가 따로 놀았다가를 반복하며 날이 저무는 사이, 저기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싸우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담임 선생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생님이 남색 운동복을 입고는 우리들을 향해 소리치고 계셨다. 너무 멀리 있어서 화가 난 것인지 반가움에 부르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우리 셋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선생님 뒤에 엄마 아빠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어른을 향해 차렷자세로 서있었다. 역시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어느새 저물어 버린 땅거미를 보고 나서야 우리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가까이 오셨는데 귓방맹이가 얼얼했다. 이어서 엄마는 그런 아빠를 나무라시며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품에 안겨서는 다른 친구도 맞거나 안기는 모습을 구경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는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나와 있었다.


알고 보니, 바로 집에 오겠다던 아이들이 모두 집을 나간 데다 봤다는 사람도 없어서 불안해하셨다고. 결국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선생님까지 전화가 가게 되었고 그 길로 동네 사람들 모두 데리고 뛰쳐나오셨다고 한다. 남사스럽다며 비공식으로 수색대를 꾸리셨는데 동네 주민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엄마의 계획은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날 집에 와서도 무척이나 두들겨 맞았다. 집에 오고 나니 엄마도 돌변했다. 동네 우사라며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냐며 싸잡아 비난하셨다. 그날밤 침대에 누워 서럽게 울었다. 없어진 소년들이 원망스럽고, 미수로 끝난 고기잡이에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눈을 떠보니 벌서 마흔이 훌쩍 넘어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기억은 대부분 망각의 시간으로 인해 옅어졌지만, 개구리 소년이 없어진 그날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다시 보게 된 기사를 찾으며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그리고 실종된 소년들의 기사를 다시금 적어본다.


도롱뇽알 주우러 간 초등생 5명, 11년간 행방불명
1991년 3월 26일 기초의원 선거일, 대구 성서지역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철원(당시 13세), 조호연(12세), 김영규(11세), 박찬인(10세), 김종식(9세) 등 5명의 아이들이 집단으로 실종됐다.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고 "도롱뇽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 뒤 와룡산 불미골에 올라갔다가 종적을 감췄다. 경찰은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5만 명의 수색인력을 동원했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1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인 2002년 9월 26일, 아이들은 최초 실종장소에서 2km 떨어진 와룡산 세방골에서 모두 유골로 발견됐다.

출처 : 인천투데이(https://www.incheon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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