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활용해 농인 작가 창작을 도와주는 멘토링을 준비하다가..
어쩌다 보니 AI를 활용해 농인 작가의 창작을 도와주는 멘토링을 하게 되었다.
멘토링을 준비하면서 과거 경험들을 살펴볼 일이 있었다. 돌아보니, 당시에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더라.
2010년에 시각장애인용 웹 메일 시스템을 만들어 납품한 적이 있다. 병특업체에서 근무할 때라 내 인생에서 생각도 못해본 두 키워드의 조합을 타의로 다루게 되었던 것. 눈을 감고 시각장애인을 흉내 내며 웹 페이지를 읽어주는 스크린리더기에 의존해 기능을 구현하고 테스트하기를 수백 번, 마침내 결과물을 전달했고 사수는 수화기 너머로 시각장애인 클라이언트와 구현사항을 확인했다. 문제없이 통과되자 나는 프로젝트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사수에게 했다. "그래서 이걸 어디에 쓰신다고 그래요?" 우리도 처음에는 전화를 하면 되지 왜 이런 게 필요하지?라는 생각을 했었고, 몇몇 기능들을 추가해 달라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개발을 했었다. 돌아온 대답은 지금도 나에게 충격으로 남아있다. 이게 시각장애인들의 교육 목적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메일을 주고받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서비스이자 경험이기에 그들에게도 이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웠다. 내가 눈을 감고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추측하고 연기하며 서비스를 만들었던 게 굉장히 오만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표면적인 부분만 인식했던 것이다. 이 이후로 나는 고객의 입장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절대 고객이 될 순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차라리 고객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UX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대학교에 복학해서 UX스터디에 참여하거나 관련된 대학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동시에 데이터를 다루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되었던 다른 경험 축도 있지만 여기선 이야기하지 않겠다.) 취직과 대학원을 고민하다가 취직이 되었고, 일을 일단 해보자는 생각에 2015년, 첫 회사에서 AI 신제품, 데이터 분석, 웹서비스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의 클라이언트는 다양한 회사내부 사람과 외부 유저들이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천차만별이었다. 내가 소속된 곳은 IT회사의 기술 중심의 팀이었는데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술과 데이터를 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을 먼저 탐색하는 게 맞지 않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변화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첫 회사 이후에는 더 큰 조직, 더 많은 데이터, 시스템과 체계가 갖춰진 조직으로 이직했다. 되려 리소스가 많다면, 데이터가 많다면, 체계가 있다면, 그 속에서 데이터를 근거 삼아 좋은 의사결정과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회사일수록 윗선의 입장과,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의미가 얼라인되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이었고, 나는 CTO로서 고객을 직접 만나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주로 다뤄왔던, 서비스의 정량데이터가 쌓이기를 기다리다가는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다양한 고객의 목소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듣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유의미한 고객의 니즈를 발굴해 내야만 했다. UX에 대한 학습과 활용은 필연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UX리서치 경험이 없는 팀원들에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트레이닝시키고 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서비스활용해서 다양한 국내외 군, 기관, 기업, 연구소, 학교에 교육과 기술컨설팅을 해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로 서비스를 개선하는 루프가 만들어졌다. 지속적으로 고객의 행동을 관찰하고, 인사이트를 찾고, 서비스를 개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아가, AC2(Agile Coach Squared)라는 애자일 코치를 키우는 코치 교육에 2018년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특히나 개인과 조직의 변화를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배워서 활용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다른 사람들을 코칭, 멘토링해 주는 일을 꾸준히 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회사일과 작가생활을 병행하며 깨달은 게 있다. 세상일 중에 혼자서 되는 건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개발자면 내 코드를 먼저 잘 짜야지, 작가면 내 작업이 먼저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서비스뿐만 아니라, 좋은 전시를 만들기 위해서도 참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필요했다. 작품 하나가 전시되기 위해서 의견을 조율해야 할 사람도 정말 많았다. 큐레이터뿐만 아니라 전시 현장을 만들기 위해 공사를 해주시는 분들과도 직접 대화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어야 했다. 함께 잘하고, 함께 자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였다.
2022년 이후로는 함께 자라는 조직문화를 만드는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들로 이직했다. 이게 성공적이지 않으면 서비스도, 비즈니스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구성원과 함께 성장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길 바랬다. 그래서 데이터 팀 리드, AI Creative Director 같은 포지션으로서 실무뿐만 아니라 매니징도 고민하며 회사생활을 했었다.
생략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결국 이 여정은 내가 살고 싶은 하루를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Connecting the Dots. 생의 끝에 무슨 그림이 그려질지 그 누가 알까. 삶이란, 화선지 위에 먹으로 그리는 그림처럼 비가역적인 행위의 연속이지만 그저 하루하루 점을 찍을 뿐이고, 그것들을 스스로가 바라는 대로 이어갈 뿐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현해 가는 삶.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하루가 나에겐 중요했고, 그렇지 않은 내 삶을 봤을 때 비겁함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다. '나는 스스로의 인생에게 비겁하진 않은가?' 이 물음은 입 속의 모래알처럼 항상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앎과 삶이 일치하는 길은 비루 할 순 있어도 비굴하진 않고, 비통할 순 있어도 비정하진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