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발걸음

18.10.11(목)

by 어깨아빠

늦은 오후에 민영이(아내 친한 동생, 채연이 엄마)가 놀러 온다길래 차를 타고 출근했다.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가야 아내랑 민영이랑 놀 수 있으니까. 또 한편으로는 복귀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돌아가야 하니 기동력 확보를 위해 차는 필수였다. 아내랑 소윤이, 시윤이가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나를 배웅해줬다. 오전에는 동네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민영이 오기 전까지 집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아내는 하루 종일 연락이 잘 안 되었다.


[오늘따라 만사가 귀찮다. 집 치우기도 싫고]


라며 푸념의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퇴근 이후의 시간을 위해 노트북 가방이랑 운동 가방을 부지런히 챙겨놨는데 집에 두고 왔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그렇다고 퇴근해서 다시 집에 들르자니 민영이한테 괜한 오해(본인 때문에 피하는 거다)를 유발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집에 가지는 않았다. 운동이야 신발은 트렁크에 있고 운동복은 헬스장에서 주니 문제가 없었다. 헬스하고 나서가 문제였다. 일단 노트북이고 책이고 아무것도 없으니 카페에 가도 할 게 없었다. 통화할 때나 카톡 할 때 아내에게 오늘 대략 몇 시쯤 들어가면 되느냐고 계속 물어봤는데 명확한 답이 없었다.


일단 롯데몰로 갔다. 왠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돌아오라는 연락이 올 것 같은데 또 그렇다고 바로 연락이 오지는 않을 것 같으니 적당히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다. 카페에 가면 휴대폰질 말고는 할 게 없으니 롯데몰에 가서 아이쇼핑이나 좀 하다가 서점에 가서 책이나 둘러보고 그러면 대략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평일 저녁이라 그런가 사람이 너무 없었다. 축구할 때, 자전거 탈 때 입을만한 언더 티셔츠와 그냥 티셔츠가 나의 관심 품목이었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고 심지어 어떤 곳은 점원도 없었다. 차라리 그런 매장은 속 편했다. 드문 발길 속에 내가 매장에 들어서면 어떤 직원들은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라고 물으며 득달같이 들러붙었다. 물론 찾는 게 있지요. 싸고(내가 생각하는 만큼 싸고) 예쁘고(누가 봐도 예쁘고) 그런 거요. 예쁜 건 많은데 예쁘고 싼 건 없었다. 싼 건 별로 없었고 싸고 예쁜 건 더 없었다.


"아 그냥 보려고요"


라고 대답해도 김정은 위원장 옆의 김여정처럼 내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혼자 쇼핑하는 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한 몇백만 원 들고 와서 사고 싶은 거 다 사면 재밌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럼 또 성취감이 없으니 재미없겠지라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마음에 들고 예쁜 거 가격표 확인 안 하고 막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다가 쇼핑을 종료했다.


아내에게 계속 몇 시쯤 돌아가면 되느냐고 물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좀 짜증이 났다. 이러다 갑자기 연락해서 이제 돌아오면 된다고 할 게 뻔했다.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는데 이것도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일단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집에 수두룩해서 새 책을 사는 게 머뭇거려졌다. 그렇다고 앉아서 읽자니 그것도 왠지 별로 마음이 안 생기고 아내에게 연락이 올만한 시간이 되었으니 그냥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려야겠다 싶어서 카페에 갔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두세 모금 정도 마시니까 연락이 왔다.


읽씹(읽고 씹기)에 대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아내는 바로 감지하고 그냥 더 있다 오라고 했지만 어차피 빈 손이라 할 게 없었다. 집으로 돌아갔더니 소윤이, 시윤이, 채연이(소윤이 친구)가 신나게 놀고 있었다. 채연이는 집에 가기 싫다며 민영이한테 계속 책을 한 권만 더 읽어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딱 한 권만 더"


라는 말을 민영이가 한 서너 번은 한 것 같다. 채연이 옆에 앉아서 함께 책을 읽던(혹은 듣던) 소윤이가 채연이 등을 떠밀며 나즈막하게 얘기했다.


"이제 가. 채연아"


집에 가기 싫어하는 채연이에게 이건희의 은닉재산만큼 많이 쌓여 있는 비타민 사탕을 잔뜩 나눠줬다.


"채연아. 내일 시간 되면 만나자"


요즘은 이걸 그냥 만인에게 Good Bye처럼 쓰는 것 같다. 낮잠 안 잔 것 치고는 굉장히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일단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지지만.


내일 서천에 가려면 짐을 싸야 했는데 아내는 여유로웠다. 내일 오후쯤 출발할 예정이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 나도 반차를 쓰기로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아내는 여전히 미스터 션샤인 종료 후 새롭게 시청할 드라마를 정하지 못하고 계속 탐색했다. 오늘은 나인룸인지 뭔지 하는 드라마의 클립 영상을 주로 보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세상에서 김희선이 제일 예쁜 줄 알았다. 김태희를 만나고 김희선만큼 예쁜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에 한가인이나 문근영, 박보영 등등 세상에는 예쁜 사람이 참 많다는 걸 또 깨달았다.


아. 물론 이가영을 만나고 나서는 내가 만났던 미인들은 다 쩌리들이었다는 걸 최종적으로 깨달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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