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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인간 입니다.

프롤로그

by 운민

바람이 세차게 분다. 그 바람을 따라 비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집안이 후끈해져 갑자기 창문을 열고 싶어졌다. 창밖에서 스며든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후각의 기억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오래 남는다고 했던가. 그 냄새를 따라, 나는 어느새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에 서 있기도 하고, 장마철 일본의 숙소 난간에 팔을 걸치고 말없이 맥주를 훌쩍거리던 순간으로 순간이동한다. 쉼 없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여행은 예고 없이 찾아와 내 곁에 앉고, 존재의 가치를 일깨워주곤 사라지는 인생의 윤활유가 되었다.


한 번 자극받은 여행의 잔상은 마약처럼 쉽게 떨쳐낼 수 없다. 폰 속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다가, 컴퓨터에 키워드를 입력해 검색해본다. 아차, 빠뜨렸던 장소와 못 먹은 음식들, 놓친 액티비티가 산더미처럼 발견된다. 다시 가야 할 명분은 생겼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욕망이 뒤따른다. 머릿속 AI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곳도 좋지만, 이곳은 어때요?" 기억 속 여행은 제 역할을 다하고 Delete 키를 눌러 사라진다. 그 자리에 또 다른 장소에 대한 열망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나는 이제부터, ‘여행인간’이다.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나는,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간다.


여행인간은 마침내 엘도라도를 발견한다. 꿈꾸던 환상의 땅에는 꿀이 물처럼 흐르고 황금으로 치장된 건물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곳에 도착한 순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자지 않아도 도파민이 넘쳐흐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가렸던 콩깍지가 벗겨지고 만다. 이곳은 무릉도원이 아닌,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세상일 뿐이었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 근심과 걱정이 다시 고개를 들고, 감각은 무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행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땅으로 내려올 시간임을 직감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비행기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쁜 기억은 그 땅에 남겨두고, 좋은 추억만 바람과 구름에 흩뿌리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언젠가 또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여행을 만나러 나설 것이다.

2025년 5월 12일 오전 10_36_3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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