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말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을 주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주제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공격이 되었고, 해석은 왜곡되었으며, 나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적’으로 분류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 하나로,
나는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 혹은 혐오자로 몰렸다.
나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자고 했다.
남성과 여성은 다르며, 서로가 가진 장단점과 역할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 다름을 억지로 같다고 선언하는 것이 진짜 평등일까?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페미니즘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여성의 권리 확대를 위해 싸웠던 그 숭고한 뜻과는 달리,
일부는 ‘권리’는 챙기고 ‘책임’은 회피하는 모순된 모습으로 이 사상을 소모하고 있다.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요구하는 순간, 그 운동은 신뢰를 잃는다.
나의 이런 생각은 곧 나를 ‘뒤처진 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조용히, 그리고 날카롭게 내 안에서 계속 자라났다.
예를 들어, 식생활에 대한 논쟁이 있다.
나는 고기를 먹는다.
단백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외면한 채 성장할 수도 없다.
비겁한 동정심보다는, 책임감 있는 식사를 선택하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윤리’다.
또 하나, 나는 SNS라는 플랫폼에 대해 회의적이다.
처음에는 소통을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여,
분노를 소비하게 만드는 정교한 ‘감정 장사터’로 변해버렸다.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표현 하나가 확대되고
그 모든 사람의 감정이 그 하나의 실수에 쏠려 버린다.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감정을 잘 조작해서 이득을 챙기고 있다.
정치인일 수도 있고, 플랫폼 운영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본질을 잃고 서로를 비난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안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외면했다.
하지만 그 모순을 스스로 인식하고 부끄러워할 수 있을 때,
그게 인간의 위엄이라 믿는다.
예수나 부처가 신성시되는 건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함을 자각할 때의 위대함을 그들이 대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도 나는 이해한다.
희생을 강요당하고, 보상이 없으며,
사회는 그 희생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결혼은 계약이 되었고, 출산은 부담이 되었다.
가족이라는 개념조차 ‘경제적 손실’로 계산되는 시대.
누가 기꺼이 감당하려 할까?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다.
희생은 삶의 본질이다.
모든 관계는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자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손해가 너무 한쪽에 쏠린다면,
그건 착함이 아니라 착취다.
균형을 찾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감내할 수 있는 손해인가,
그건 명제화할 수 없지만,
각자가 자신의 양심으로 조절해 가야 할 숙제다.
지금, 우리는 중산층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기에 작은 손해에도 민감해졌다.
작은 이득을 쥐기 위해 더 큰 분노를 쏟는다.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하지만,
슬프고도 무서운 현실이다.
나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모순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게 내가 이 시대에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살아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