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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l 23. 2021

실수해도 괜찮아

빨간 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 : 레이어 케이크


누구든 바보 같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해 쿠키를 구웠는데, 그 사람이 밀가루 알레르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을 때. 내가 건네준 쿠키를 받아들던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하염없이 떠올리며 전전긍긍하게 되는 날들.

이메일 주소에서 영문 표기 하나를 잘못 써서 거래처로 가야 할 메일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마우스를 클릭한 직후 알아차렸을 때.

기껏 신경 써서 차려입고 좋아하는 뮤지션의 콘서트에 갔는데 전철을 잘못 갈아타서 입장 시간에 늦어 버렸을 때.

큰 실수는 아닌 것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을 계속 쿡쿡 찔러대는 실수들. 아무렇지 않은 날들의 순간에 불쑥불쑥 치솟아 올라 이마를 찌푸리게 만드는 것들.

내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내가 좀 더 능숙했으면.

그런 자책들로 마음에서 계속 쓴 맛이 나는 것만 같은 날이다. 

그런 밤이면, 달콤한 케이크를 사서 집에 돌아간다. 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먹는다. 굳이 예쁜 컵이며 접시를 꺼낼 필요도 없다. 예쁜 걸 예쁘게 차려놓고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에 쓴 맛이 차오를 때면 그런 여유도 없어지니깐.

케이크를 먹는 동안 함께 있어줄 친구는 『빨간 머리 앤』 이다. 1908년 발표된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앤은 숲의 요정이, 무지개를 스카프 삼아 두를 거라는 상상을 할 줄 안다. 감정 표현이 무척 솔직해서 울고 웃고, 정신없이 바쁘게도 보인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그린게이블즈의 초록색 지붕 집, 매튜와 머릴러 남매의 집에 입양되어 왔다. 

그리고 앤은 실수투성이다.

학교에 새로 온 선생님, 앨런 부인이 앤의 집으로 초대를 받고 온 날.

앨런 부인의 우아함에 반해 있던 앤은, 부인을 위한 케이크를 굽겠다고 나선다. 베이킹파우더의 질이 좋지 않아 케이크가 잘 부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굽는다. 앤의 걱정과 달리, 케이크는 멋진 황금색으로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 오른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잘라, 겹과 겹 사이에 바닐라 시럽을 바른다. 듬뿍.

레이어 케이크의 완성이다.

근사한 식사를 마치고, 앤은 부푼 마음으로 케이크를 내 간다. 앨런 부인이 무척 맛있으니 한 조각 더 주렴, 하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그러나 케이크를 먹은 앨런 부인의 표정은 미묘해진다. 이상함을 눈치 챈 머릴러가 외친다. “앤! 네가 넣은 바닐라 시럽 병을 가져오렴!” 그건 바닐라 시럽이 아닌, 바르는 진통제였다.

시럽 대신 진통제가 발라진 케이크라니. 분명 지독한 맛이었을 거다. 무척 쓰고도 이상한 맛이 났겠지. 그런데 왜일까. 그 장의 끝까지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케이크가, 그렇게까지 최악의 맛은 아닐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앨런 부인의 따뜻한 말이, 쓴 맛을 사라지게 만들어서일까.

지독한 맛의 케이크를 먹고도 앨런 부인은 앤을 혼내지 않는다. 오히려 풀이 죽은 앤을 위로한다. 케이크의 맛과는 상관없이, 앤의 친절한 마음이 고맙다고. 

결과에 상관없이, 노력 그 자체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앤의 주변에는 많이 있다. 앤의 실수를 혼내도, 고친다면 괜찮아 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앤은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일이라는 날은 아직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새로운 날이라 생각하면, 즐거워요.”

그 말에 머릴러는 시크하게 대답한다.

“내일도 틀림없이 또 잘못을 저지를 게다. 너 같은 실패의 천재는 본 적이 없어.”

앤이 한 실수와 일상 속에서 흔히 저지르는 우리의 실수는 닮아 있다. 확연한 원인도, 실수로 내몬 악역도 없다. 조금 서툴러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것은 때로 상상한 적도 없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긴 시간 마음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기에 앨런 부인의 다정한 한마디처럼.

마음에서 쓴 맛을 덜어내 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당장은 그런 사람이 옆에 없더라도 괜찮다.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케이크를 한 입 작게 잘라 먹는 동안에는.

한 입씩, 케이크를 먹으며 상상해 본다. 꽃이 가득 피어있는 넓은 들판. 나무다리가 걸려 있는 반짝이는 강물. 오랜 시간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며 서 있었을 것 같은 커다란 왕벚꽃 나무가 보이는 창가. 앤의 방에, 앤과 함께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본다.

앤을 앤답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던 그린 게이블즈 하우스. 매튜와 머릴러의 가정에 앤이 합류하게 된 것도 실수 때문이었다. 남자아이를 원한다는 매튜의 말을, 여자아이를 원한다는 것으로 잘못 전한 스펜서 부인의 실수로, 앤은 에이번리 마을에 오게 되었다. 

당장은 창피하기만 한 실수라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머릴러를 흉내 내 조금 시크하게, 자신에게 속삭여 본다. 

“네 잘못이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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