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Oct 08. 2021

연약하지만 생생한 타임머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마들렌



시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95년,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타임머신』이 발표되었다. ‘타임머신’ 이란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미래의 발전상을 엿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시간여행은 곧, 사람들을 더욱 은밀한 욕망으로 이끌었다. 

과거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욕망.

이 욕망에 이끌린 물리학자 로널드 몰렛은 2000년 ‘타임머신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책 『시간 여행자』에서, 몰렛은 그가 타임머신에 흥미를 느낀 계기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이다. 로널드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 누구든 한 번쯤은 상상해 보게 되는 일이다.

혹은 뚜렷한 이유나 목적 없이, 어른어른 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한 장면을 보고 싶어질 때도 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아 있지 않은, 그러나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분명히 맺혀 있는 장면. 시간을 되돌려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는 상상을 종종 하게 된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내 이름을 부르던 누군가의 목소리, 골목 한편에서 어른거리던 길고 검은 그림자의 정체, 장롱 속 이불과 옷가지 사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 기억을 테이프처럼 돌려 감을 수 있다면, 한 번쯤 확인해 보고 싶은 희뿌연 풍경들이 타임머신을 타면 선명하게 내 앞에 나타날 줄 터이다. 

그렇지만 타임머신은 없다. 어딘가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믿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휴대전화처럼 쉽게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과학실에서 넘어진 것만으로, 원하는 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이 없어도,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작가이다. 약한 몸과 세심한 성격을 타고난 탓에 소리와 냄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 글을 쓸 때에도 코르크로 밀폐된 내실에서 써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 내려간 자전적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 번에 읽어 내려가기에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양이 방대한 것도 있지만, 장마다의 묘사가 무척이나 섬세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화자인 ‘나’는 사소한 냄새와 소리, 풍경의 한 곳에서조차 사유와 기억을 이끌어낸다.      


... 그때 나는 광장으로 쏟아지는 태양의 색깔, 시장의 더위와 먼지, 가게의 차양이 던지는 그림자 모양까지도 정확히 알았다. (중략) 우리는 테오도르네 가게에 가서 보통 때보다 더 큰 브리오슈 빵을 갖다 달라고 했는데, 그때 눈앞에 보이는 종탑은 축성받은 커다란 브리오슈 빵처럼 노랗게 잘 구워진 모습으로 태양 껍질과 고무질 수액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그 뾰족한 침으로 푸른 하늘을 찔러 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의 광장에 서 있던 생틸레르 종탑이 묘사 하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냄새와 향기, 기억과 사유를 절묘하게 엮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그야말로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작가가 사물의 특성 중 하나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여, 어른어른해진 과거를 자신의 앞에 데려오는 과정은 더없이 흥미롭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도 한 번쯤, 그렇게 해 보고 싶어 진다. 작가처럼 유려한 문체로 쓰지는 못하겠지만 어떠한 사물 하나를 붙잡고 더듬더듬 과거로 기어가 볼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맛있는 것이 좋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표하는 과자라면 역시 마들렌이다. 작가는 마들렌의 향과 생김새를 통해 그리운 어머니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온다. 잠들지 못하고 추워하는, 몸 약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권했던 홍차 한 잔과 마들렌. 어렸던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 입 먹자마자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미로움.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기쁨. 삶의 본질이 나 자신이라 느끼게 해 주는 기쁨. 그는 그 뒤, 몇 번이고 그 맛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애쓴다. 주인공은 마들렌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찾아낸다. 맛과 향을 통해 기억을 불러오는 이 과정은 매우 아름다운 문구로 쓰여 있다.     


...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을 불러와 준 과자, 마들렌.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이제는 잃어버린 기억과 추억에 대한 상징적인 과자가 되었다.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촉매제로써 ‘프루스트의 마들렌’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을 정도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뮤지컬 <오렌지 마들렌> 등에서 마들렌이 기억의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꼭 마들렌이 아니라도 좋다. 유독 정이 가는 과자. 어릴 적 먹어 보았던 과자.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이유 모를 그리움이 몰려오는 과자나 빵, 혹은 음식.

그 음식의 향과 맛을 엔진으로, 한 번쯤 시간여행을 떠나 볼 일이다.     













책을 구입해주시면 창작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의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응원해 주세요. 

자신을 찾아 나가는 두메별의 이야기  

[두메별, 꽃과 별의 이름을 가진 아이]는 아래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788926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하지 않아도 가족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