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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Oct 22. 2021

언젠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초원의 집 : 옥수수빵

월요일은 빨래.
화요일은 다림질.
수요일은 옷 깁기.
목요일은 버터 만들기.
금요일은 청소.
토요일은 빵 굽기.     


어릴 적부터의 친구들과 만나면, 이야기는 한 번쯤 과거로 흐르게 된다. 신기하게도, 흘러간 일들을 회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당시에는 시시했던 일상이, 현재로 오면 반짝반짝한 빛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망각이란 양념을 솔솔솔 뿌리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 일을 겪었을 때의 감정은 잊히고, 장면만이 남는다. 살짝 바래진,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장면들이.

로라 잉걸스 와일드 Laura Ingalls Wilder의 작품 『초원의 집』을 읽다 보면 그런 사진과 같은 장면들에 저절로 미소 짓게 된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보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화자인 로라의 어린 시절부터 결혼한 후의 이야기까지, 9권에 걸쳐 한 소녀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그중 유독, 로라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정감이 가는 이유는 왜일까.

로라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유복하지 않다. 그 상징으로 작품 곳곳에, 그리고 꾸준히 등장하는 것이 옥수수 빵, 저니 케이크 journey cake이다. 케이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상은 옥수수로 만든 빵이다. 이스트를 쓰지 않고 반죽을 얇게 구워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곡물가루와 물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팬케이크와 비슷하지만, 달걀조차 넣지 않고 만들었다는 점에서 훨씬 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이주민들 사이에서 옥수수는 중요한 식량이었다. 그들은 산림을 개척해야 했고, 원주민들과의 전쟁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 농사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품종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아, 안정적인 밀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옥수수는 뿌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잘 자라는 식물이었다. 게다가 1 에이커 당 수확량이 밀의 4배였고, 파종에서 수확까지도 밀에 비교해 3분의 1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관도 간단했다. 후에 호밀의 재배가 이루어진 후에도, 밀로만 만든 빵은 가난한 집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초원의 집』 이야기 속에서, 로라의 엄마는 저니 케이크를 ‘자니 케이크’라고 부른다. 로라도, 로라의 엄마도 왜 빵을 케이크라 부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로라의 엄마는 북부 사람들이, 남부 사람들이 먹는 빵을 농담으로 케이크라 불렀을 거라 추측한다. 주변 사람들은 여행할 때 갖고 다니면서 먹는 빵이라는 뜻에서 저니 케이크라 불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실상 이 단어의 역사는, 로라의 엄마가 예상한 것보다 길다. 옥수수 빵을 ‘저니 케이크’라 부른 것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문헌부터 등장한다. 이 이름의 가장 유력한 설은, 미국 원주민들이 먹던 빵이기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개척민들은 초기 원주민들을 ‘injun’이라 불렀는데, 이는 지금의 ‘인디언’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미국에 정착한 개척민들에게 옥수수 재배법과 요리법을 가르쳐 준 것이 원주민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꽤 설득력을 가진다.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갈아 팬케이크처럼 굽는 것을 본 이주민들은 그것을 ‘injun들의 팬케이크’ 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사랑받는 음식이 되면서 비슷한 스펠링을 가진 영단어와 혼합되어 최종적인 형태를 이루었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물과 소금, 옥수수 가루로만 구운 빵이 아주 맛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소설 속, 추운 겨울날 옥수수 빵을 나누어 먹는 장면은 무척이나 맛깔스럽게 묘사된다. 로라는 말한다. 일주일 중, 버터 만드는 날과 빵 만드는 날이 가장 좋다고.

로라가 먹었을 옥수수 빵을 상상하면, 왜인지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사 먹었던 떡꼬치가 떠오른다. 구운 떡에 치덕치덕 소스를 발라 팔았던 떡꼬치. 객관적으로, 그것이 아주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쌓아 놓고 팔았던 탓에 떡은 딱딱했고, 소스는 그저 맵고 달뿐이었다. 실제로 어른이 되고도 몇 번인가 사 먹었지만 그 이상의 맛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의 맛을 기억하면 입에 군침이 돈다. 그것은 아마, 떡꼬치의 맛이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추억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초원의 집』 시리즈를 완독하고 나면, 누구든 비슷한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시리즈가 뒤로 갈수록 건조해지는 것이다. 가슴 설레는 묘사는 줄어들고, 문체는 딱딱해진다. 작가의 노년에 가까워질수록 이 현상은 심화된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건대, 이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라 잉걸스가 겪은 사건이, 채 추억으로 전환되지 못한 사건일수록 건조하게 서술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고통의 감정이 생생하게 남은 기억을, 작가는 미화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은 늘 미화된다. 미화하지 않으면, 돌아볼 수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기억을 미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때의 고통에서는 조금 벗어났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기억을 싹둑싹둑 잘라, 조금이라도 예쁘게 씹어 삼키고 싶은 날이면 옥수수 빵을 먹어 보는 건 어떨까. 초원의 집을 펼치고, 동생과 인형 쟁탈전을 벌이는 로라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로라가 그토록 좋아했던 버터 우유는 없지만, 따뜻하게 데운 우유도 한 컵 앞에 놓고 말이다.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다. 머릿속에서 찰칵. 잘라내고 싶었던 기억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먹었던 빵과 우유의 맛으로 조금씩 덮어 씌운다. 언젠가는 그 기억이 폴라로이드처럼 바란 추억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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